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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3월 22일 사순 재5주일 영적독서
작성자신승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21 조회수74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5년  3월 22일 사순 제5주일 영적독서

 

불멸의 밀알 / 2015년 3월 22일 사순 제5주일 서울주보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부활절 서간에서
 
(EP. 14,1-2: PG 26,1419-1420) 
 

우리는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다가오는 주님의 축제를 지냅시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이 되어 주신 저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나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분은 목자요 대사제, 길이요 문이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이 장엄한 축제 또한 그렇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복된 사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고대하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파스카 양으로서 희생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기쁨, 나를 둘러싼 이들에게서 나를 건져 주소서." 라고 하는 시편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악에서의 해방-이것이야말로 참된 기쁨이요, 이것이야말로 참된 축제입니다. 누구든지 이것을 얻고자 한다면 흠 없는 생활을 하고 주님의 평화와 두려움 속에서 묵상해야 합니다.

성인들도 이렇게 했습니다. 성인들은 축제 속의 사람들처럼 그들의 전생애를 지냈습니다. 그중의 한 분인 복된 다윗은 밤중에 한 번만이 아니고 일곱 번씩이나 일어나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위대한 모세는 히브리인들을 강제 노동으로 억압했던 파라오와 다른 모든 이들을 누르고 쳐이기신 하느님을 찬가로써 찬양하고 찬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위대한 사무엘과 복된 엘리야 같은 분들은 끊임없는 기쁨으로 거룩한 전례를 거행했습니다. 이 모든 분들은 거룩한 생활로써 자유를 얻어 이제는 하늘에서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순례 생활을 할 때 그림자 속에서 상징으로 지냈던 것을 이제는 천상에서 실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 파스카 축제를 합당히 지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다가오는 축제를 맞이하면서 우리 지도자로 누구를 모셔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나와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라 부르는 그분 외에 다른 분을 지도자로 모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나는 길"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 요한이 말하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한 대로 우리 영혼을 정화시키십니다. "너희는 네거리에 서서 살펴보아라. 어떤 길이 나은 길인지 물어 보고 그 길을 가거라. 그래야 평안을 얻으리라."

옛적에 염소의 피와 송아지의 재를 불결한 것 위에 뿌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신만을 정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느님 말씀의 은총을 통하여 모든 이는 영적으로 완전히 깨끗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짝 뒤쫓아 따라간다면 천상 예루살렘의 성문 앞뜰에 도달하여 거기서 영원한 축제를 미리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도 구세주를 자기 지도자로 모시어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들에게 은총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따라갑니다. 즉 주님의 축제를 말로써만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지냅니다.


2015년 3월 22일 사순 제5주일
독서기도 제2독서 발췌(대성무일도 제2권 P 315-317)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축일 05월 02일)

 

아마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으로 여겨지는 성 아타나시우스(또는 아타나시오)는 잘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특히 성경과 신학이 뛰어났다. 318년 부제로 서품된 후 자기 고향의 알렉산데르(Alexander)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단죄했던 325년의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알렉산데르 주교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3년 뒤인 328년 4월 17일 알렉산데르 주교가 사망한 뒤 그 자신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이집트 아리우스파의 심한 반발에 직면하였는데, 이러한 반기는 지중해 제국 전역으로 무섭게 파급되었고, 아리우스를 지원하던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도 덩달아 기세를 올렸다. 물론 이런 세력 뒤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원이 있었다. 그는 335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로 첫 번째 유배되었다.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고,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새 황제는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뒤 다음 해에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의 직위를 복권시켰다. 그러나 성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에 의해 2년 후 재차 추방되었다. 이 때 그는 로마(Roma)로 가서 7년 동안 머물러야 했다.

346년부터 356년까지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는 가장 평화로운 황금의 시간이었고 또 그의 주요 저서들도 이때에 나왔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인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그를 추방키로 하고 군인들을 보냈다. 체포 위험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의 사막 은수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361년에 죽기까지 자기 교구민들을 지도하였다. 그 이후에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두 차례나 유배를 더 당하였고, 366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평화롭게 자기 교회를 다스리고 사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날의 모든 갈등과 폭력으로 인하여 피폐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아픈 상처들을 치료하는데 주력하면서, 저술과 강론을 통하여 위대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는 작은 사람이었으나 아주 강인하고 정신력이 뛰어났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문하기로 결정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평신도들도 우왕좌왕하였고, 수많은 주교들도 주저하였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성 아타나시우스는 존 헨리 뉴만의 말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저술한 그의 뛰어난 저술과 연설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저서들을 많이 남겼는데, “안토니우스의 생애”(Vita Antonii)를 비롯하여 성서 주석, 시편 주해 등을 남겼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대 바실리우스(Basilius, 1월 2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 그리고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와 함께 그리스의 교회학자이자,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유배 중에 저술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보낸 해명”(Apologia ad Imperatorem Constantium), “수도자들에게 보낸 아리우스주의의 역사”(Historia Arianorum ad Monachos) 등이 있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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