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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5년 3월 30일 성주간 월요일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깁시다
작성자신승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29 조회수587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5년  3월 30일 성주간 월요일 영적독서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Guelferbytanus 3: PLS 2,545-546)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깁시다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영광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고 인내에 대한 교훈입니다.

성부와 함께 영원하신 독생 성자께서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태어나시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그 사람들의 손에서 죽기까지 하셨다면, 신자들의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에서 무엇인들 기대할 수 없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여 주신 미래는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해주신 것, 지금 우리가 기념하는 그것은 더욱 위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악인들을 위해 죽으셨을 때 그들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주님이 먼저 악인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셨다면, 성도들에게 당신 생명을 주시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나약함이여! 왜 너는 우리가 언젠가는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 데 망설이는가?

이보다 훨씬 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써 일어났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말씀이 아니시겠습니까?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서 육신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을 취하셨기에, 불사 불멸이신 분께서 죽으실 수 있었고 멸하고야 말 것에다 생명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먼저 멸하고야 말 인간의 것을 취하셨으므로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생명을 얻을 능력이 없고 그분께는 본질상 죽음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와 놀라운 상호 교환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의 죽음을 보고 수치심을 갖기는 커녕 거기에 모든 신뢰심을 두고 크게 자랑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찾으신 죽음을 취하심으로써 우리 스스로 가질 수 없는 그 생명을 당신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지극히 충실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죄 없으신 그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겪으실 만큼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다면, 우리를 의화 시키신 그분이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약속하신 분이 진실하다면, 아무 죄 없이 악인들로부터 형벌을 견디어 내신 그분은 우리에게 성인들이 받는 상급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형제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용감하게 또 분명히 고백합시다. 망설이는 마음이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수치심을 지니고서가 아니라 자랑스럽게 고백합시다.

이 점을 잘 이해했던 사도 바울로는 이것을 자랑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실상 바울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실 때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또는 우리처럼 사람이 되셨을 때 만물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신적인 많은 업적들을 회상하면서 자랑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로가 말한 것은 이것뿐입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2015년 3월 30일 성주간 월요일
독서기도 제2독서 발췌(대성무일도 제2권 389-391)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축일 0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이교도인 로마 관리인 부친 파트리키우스(Patricius)와 그리스도인인 모친 성녀 모니카(Monica, 8월 27일)의 아들로 354년 11월 13일 아프리카 누미디아(Numidia) 지방의 타가스테(Tagaste, 현 알제리 북쪽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타가스테와 인근 마다우라에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는데, 370년에는 법률가가 될 꿈을 안고서 수사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카르타고(Carthago)의 대학교에 들어갔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는데, 여기서 한 여인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여 그의 부친이 항상 소중히 여기던 아들 아데오다투스(Adeodatus)를 낳았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여러 지방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생활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는 점차적으로 철학에 흥미를 갖다가 존재 문제 특히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373년경 마니교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타가스테와 카르타고 등지에서 10여 년간 교사생활을 한 후 383년에 로마(Roma)로 가서 수사학교를 세웠으나, 학생들의 태도 때문에 크게 실망하다가 384년 가을부터 밀라노(Milano)의 수사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신플라톤 철학과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 주교의 설교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암브로시우스의 강의를 통해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은유적 또는 영적으로 해설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한편으로는 명예, 재산, 결혼 등의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정원을 산보하다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고 반복해서 외치는 신비로운 소리를 듣고 성서를 들어 펼쳐 읽어 본 것이 사도 바오로(Paulus)의 로마서 13장 13절의 말씀이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그래서 그는 386년 8월 교수직을 그만두고 그의 친구 성 알리피우스(Alypius, 8월 15일)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387년 4월 13일 부활성야에 밀라노에서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지도로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와 일종의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다가, 391년에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사제로 서품되었고, 5년 후에는 히포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북 아프리카의 교구에서 그리스도교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주교 중의 한 사람으로 거의 35년을 봉사하였다. 그는 사목자의 권위를 행사하되 백성들의 복리와 행복을 위하여 사용하였고,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으며,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범사를 행했으며, 주일과 축일에는 꼭 강론을 하였고, 예비자 교리를 담당하였으며,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의 재정지원을 물색하는 등 사회정의를 위하여 주교직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글을 썼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교구 신자들과 도나투스파(Donatism) 이단자들에게도 반박문을 써 보냈다. 특히 마니교(Manichaeism)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를 반박하는 강연회에는 청중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외에도 삼위일체와 은총론에 관해서도 책을 썼는데, 그의 연구 대상은 매우 광범위하였다. 전해오는 저작으로는 113종의 책과 논문, 200여 통의 편지, 500회의 설교 등이 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는 자신의 개종 과정을 기록한 자서적적 저서인 "고백록"(Confessiones)과 호교론적 저서인 "신국론"(De ciavitate Dei)이 있다. 그는 흔히 '은총론의 박사'(Doctor Gratiae)라고 불린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교회학자이며 영성가였다. 그는 서방 그리스도 교회 지성의 모델로서 가톨릭 신앙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반달족이 히포를 포위 공격하던 430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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