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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4.16 목/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낯선 나를 새롭게 만나기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5-04-15 조회수889 추천수8 반대(0) 신고

     

부활 2주 목 요한 3,31-36(15.4.1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The One from Heaven

 

 

                   


 낯선 나를 새롭게 만나기  

 

살아가면서 우리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많은 것들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면서도 익숙한 자신을 조종하는 것이 바로 무의식의 작용임을 눈치채지 못한 채 살아간다. 부활의 삶은 어쩌면 니코데모와는 달리 낯선 자신을 새롭게 보는 것이 아닐까?

오늘 복음의 대목은 니코데모 일화에 나오는 육과 성령의 대조에 바탕을 두면서(3,1-21),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을 대조하고 있다. 곧 ‘땅’과 ‘위’가 서로 분리되고 구별되듯이 ‘위에서 오시는 분’과 ‘땅에서 난 사람’도 대립되어 있다(3,31). 그러나 여기서는 대립적인 존재 상황보다는 천상과 지상 사이에 놓인 엄청난 거리를 시사하고 천상과의 관계 속에서 지상이 상대화되었을 뿐이다. 곧 지상이 천상에 예속되어 있다는 점이 강조된 것이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3,31)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일치하시므로 인간적인 한계와 약점에 놓인 모든 인간들보다 뛰어난 절대적 우월성을 지닌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쏟아 부음으로서, 그분을 따라 그분을 통하여 교회가 베푸는 세례이다. 반면에 요한의 세례는 ‘물의 세례’일 뿐이며 빛의 그림자일 뿐이다. 요한은 땅에 속한 사람으로서 거기서 출발하여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일뿐이다. 우리도 위로부터 성령에 의하여 새로 나지 않으면 인간답게 살아갈 수도 하느님과 일치될 수도 없다. 새로 나지 않으면 결국 육의 영을 따르게 되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게 되어 자기분열, 자기상실, 공허, 자기소외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알 수 없어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나를 아는 결정적인 길이요, 나를 아는 것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길이다. 또한 나를 아는 것이 이웃 사랑의 출발점이다. 나를 알고 진정으로 만나려면 기도해야만 한다. 그분의 빛이 아니고서는 자신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35-36)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밀접한 결속관계로 언급되면서 아버지의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곧, ‘한량없이’(3,34) 선물로 주어진 사랑이며,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내주는’ 사랑이다. ‘그의 손에 내주셨다’란 말은 온갖 진리를 계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분의 마음은 하느님의 자비심이며, 그분의 몸짓은 하느님의 몸짓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여기서 믿음은 구원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3,11) 예수님의 삶을 실제로 따르는 것까지도 뜻한다(8,12). 반대로 예수님을 거부하면 죽음과 어둠만이 남는다.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두고 사는 자들은 그 본성도 세속적일 수밖에 없으며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를 찾아야 하는가? 어디에서 시작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야 하고 그분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 ‘거듭 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선택, 배척이 아닌 포용, 완고함이 아닌 너그러움, 자신을 위해 챙기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내놓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낯설고 인정하기에 어색한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의 영으로 새롭게 보기를 주저하지 말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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