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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4-17 조회수887 추천수7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4월 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Where can we buy
enough food for them to eat?
(Jn.6,5)
 
 
제1독서 사도 5,34-42
복음 요한 6,1-15
 

인도 콜카타 지역의 빈민들을 돌보며 헌신하여 ‘빈자의 성녀’로 추앙받았던 복자 마더 데레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복자 데레사 수녀님께서 활동하셨던 인도의 콜카타 빈민 지역은 아름다움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곳이었지요. 도랑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넘쳐났고 계곡에는 상한 음식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시체로 인해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이러한 곳에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한 구호,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한 곳을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자기 집에 이상한 냄새 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이 냄새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다 기울일 것입니다. 즉, 나쁜 냄새는 유쾌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에, 창문을 활짝 열고, 초나 방향제를 켜서 냄새를 어떻게든 없애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냄새나고 지저분한 곳을 복자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냄새 나는 것, 지저분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바라보니, 그 사람 모두가 아름다웠던 것이지요.

만약 복자 데레사 수녀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만 사셨다면 결코 콜카타의 삶은 행복하지도 또 있어야 할 곳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셨고, 그래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솔직히 하느님의 시선으로 살아야 함을 깨달으면서도 몸이 따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그것을 따라야 행복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힘들어 하게 됩니다.

어제는 작년 4월 16일 온 국민을 슬프게 했던 304명의 희생자를 냈던 세월호 1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날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 마련이 확실하게 이루어져야하는데, 경제성과 세속적인 이유를 들어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힘주어 강조하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라면서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안드레아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면서 주님의 힘을 알면서도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힘들다며 포기하는듯한 말을 던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이제 빵의 기적 이후 사람들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시려고 하지요. 이 또한 주님만 있다면 배고플 걱정이 없겠다는 세상의 기준을 내세우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들을 피해 산으로 가십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곳에서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자리를 만들어드려야 합니다. 그 자리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이 바로 세워지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나를 버리는 이런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고, 이런 사랑에서 우리는 복된 삶과 더불어 세상에 나온 보답을 얻으며 세상의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톨스토이).


복자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생전 모습입니다.

 

장미의 힘으로

독일 시인 릴케가 파리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산책길에 매일 동전을 구걸하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동전 대신에 가지고 있던 장미 한 송이를 건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릴케의 뺨에 키스를 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할머니께서는 며칠 동안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할머니께서는 다시 그 산책길에 나타나셔서 구걸을 하셨습니다. 릴케의 친구가 물었지요.

“돈이 없어서 할머니가 그 동안 어떻게 사셨을까?”

이 물음에 릴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장미의 힘으로.”

사랑이 없는 동전 몇 개의 힘이 클까요? 아니면 사랑이 담긴 장미의 힘이 클까요? 지금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건네는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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