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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길(요한6,48,50,57)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5-04-24 조회수661 추천수0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6,57)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누리기를 원하지만 잘 먹을 줄 모르고 잘 누릴 줄도 모르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나님을 만질 수 있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을 호흡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러나 실행 면에서는 많은 한계성이 있음도 사실이다.

 

생명나무, 생명의 떡, 생명수, 생명의 영, 생명의 말씀 등 그리스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많은 용어들이 있다. 생명나무는 근원을, 생명의 떡은 이 생명이 먹을 수 있는 것임을 말하며, 생명수는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생명의 영은 하나님의 영을, 생명의 말씀은 이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을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도가 떡이시라면 어떻게 그분을 먹을 수 있는가?

우리가 성경 안에 어느 곳을 보든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있다. 말씀 안에 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4,4).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은, 곧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산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먹는 방법은 자신을 열고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영양을 공급받고, 강건케 되고, 안위를 받으며, 그분으로 건축될 것이다.

성경은 고갈되지 않는 풍성한 광산이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명수로 누리는가?

영적으로 마시거나 호흡하는 것은 곧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 읽는 것과 기도를 연합해보라!

기도를 만들어 내지 말고 당신이 읽은 성경 말씀을 기도로 반복하라!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습관화할 때 양식과 음료가 모두 충만케 될 것이다.

 

체험해보라!

망설이지 말고 체험해보라!

지금까지 당신은 당신의 생활을 위하여 주님의 뜻을 찾으려고 했으며,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에 관심했으며, 또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시간을 들여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 계명들의 영역에 속한 기도이다!

 

그러나 공허한 기도에서 돌이켜 이제 온전히 그리스도를 주목하라!

<주여! 내가 말하는 것이 당신의 뜻입니까? 주여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라고 묻지 말라. 그 보다는 단순히 이렇게 기도하라!

<주여! 당신이 말씀하시겠습니까? 나의 관심은 옳고 그름이 아니며 말하느냐 말하지 않으냐가 아닙니다. 나는 다만 당신이 말씀하고 계심을 관심 합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아내에 대하여 당신의 인내가 바닥이 났다면 이렇게 기도해보라.

<주여! 내 아내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주님 당신도 내 아내 때문에 미치겠습니까?>

그분은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분노의 문은 닫혀질 것이다!

이제 당신은 이해했는가?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배우라!

모든 일을 그분과 함께 하라!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하느냐, 즉 당신인가 아니면 그분인가 하는 문제이다!

알렐루야!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6:57).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의 몸에 의해 동화되어 우리의 부분이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그분은 우리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표현이 된다!

우리가 자신을 열어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생명나무에 참예한다.

그분은 심지어 새 예루살렘에서도 우리의 양식과 음료이시다!

 

알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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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한 목자다!/ 주일복음말씀묵상(요한10,10-18)

 

 

1. 예수님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신다. 그리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적법한 목자임을 입증하신다. 더 나아가서 그 자신이 유일하게 적법한 출입문이다(7).

주님을 제외하고 혹은 그를 스쳐 지나서 양 떼에 손을 대려고 하는 사람은 절도이며 강도이다. 그들은 양 떼에게 죽음을 가져올 뿐이다. 예수님이 문이라는 사실은 양들에게도 해당한다(9). 오직 예수 안에서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문이 열려 있다.

 

절도와 강도는 목자가 아침에 나타나기 전에 밤중에 온다. 이 비유의 수사적인 말씀은 모세나 예언자들 혹은 세례자 요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1,17,19-23; 3,29-30).

여기서 이 말씀의 중점은 오히려 하느님의 위탁이 없이 인간에게 하느님의 구원에 관한 지식을 전해 주려고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곧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메시야들, 혹은 그 당시 유대 백성의 정치적 지도자들이나 종교적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2. 이 비유의 배경은 이 당시의 팔레스티나에 널리 행해지던 풍습이 그 바탕에 놓여 있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울타리를 쳤거나 담으로 에워싼 큰 우리에 여러 사람의 양 떼를 함께 모아 두고 문지기가 그 문을 지키는 일이 흔했다.

양들은 시력이 약하고 움직임이 둔하지만 자기 주인의 독특한 소리를 착오 없이 알아듣는 재주를 가진 동물이다. 이른 아침에 목자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 양 떼를 부르면 양들은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정확히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 떼를 확인하고 끌고 나와 목초지로 인도한다. 여기서 문지기는 여러 목자들로부터 보수를 받고 그들의 양을 큰 우리에 모아 지켜주는 사람이다(1-5).

 

3. 목자의 모습은 삯꾼의 모습과 다르다. 삯꾼에게는 돈이 주 관심사이고 양들과는 아무런 내적인 관계가 없다. 예수님은 양들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치신다(11,15).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잘 알고 계시며, 그들과 밀접히 결합되어 계신다. 예수님과 양들 사이의 이러한 친숙 관계는 그 자신의 존재의 비밀, 곧 하느님과 그의 결합관계에 맞닿아 있다. 예수님과 양들 사이의 관계는 그 깊이에 있어서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정확하게 대응한다(14-15).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입증하신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신이 그 안에서 자기의 양 떼를 돌보시는 바로 목자이시다!

예수님과 비교할 때 모든 경쟁자들은 삯꾼, 도둑 및 강도로 평가될 수 밖에 없다(8).

 

4. 16절에서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 곧 부활 이후에 이방 민족들에 대한 선교 및 유대인과 비유대인으로 구성된 하나의 교회 공동체가 시야에 나타난다(11,51-52). 그러나 이 둘은 모두 예수님의 목숨 희생의 결과요 열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마무리로 무엇을 더 말해야 한다.

곧 예수님의 죽음은 자발적으로그리고 하느님의 절대적인 권세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하느님은 그 목숨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 둘, 곧 목숨을 버리는 것과 그것을 도로 찾는 것은 동시에 하나의 계명, 곧 아버지의 위탁에 상응한다.

그것은 복종의 행위이며, 오직 아들만이 실천할 수 있다(5,19). 아들의 전권과 복종은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 이 둘은 그 밀접한 결합 속에서 아들이 깊은 곳에서 어떻게 아버지와 하나인지를 보여준다. 알렐루야!

 

5.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라고 말씀하시고, 11절은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10절의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zoe)로서 영원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11절의 목숨은 헬라어로 쉬케(psuche)로서 혼, 혼 생명, 곧 사람의 생명을 뜻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양들(10,15,17-18)이 조에의 생명(10,10), 곧 영원한 생명(10,28)을 얻을 수 있도록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분의 쉬케의 생명, 곧 사람의 생명을 버리셨다!

이 거룩하고 영원한 생명에 의해 그들은 한 무리(교회 공동체)가 되어 선한 목자이신 그분 아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그분은 이 목적을 위해 그분의 양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거룩한 생명으로 먹이신다.

 

주님의 거룩한 생명은 결코 죽임을 당할 수 없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심으로써 죽임을 당한 것은 그분의 사람의 생명이었다.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 사람이신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조에의 생명을 영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구속을 성취하고자 그분의 사람의 생명을 버리셨다. 그분은 우리가 구속받은 후에 그분의 조에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영접할 수 있도록 그분의 사람의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

 

6. 선한 목자는 어떤 일을 하는가?

궁극적으로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선한 목자의 표징이다!

자기 양 떼의 죄를 덮어 버리고 씻어 버리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죽음에 내주었다. 다시 그들을 하느님께 올바로 연결시키고(속죄와 의인되게 함), 하느님의 참 양떼, 곧 하느님의 새 백성이 되게 하는 새 언약 제사로 자기 목숨을 내주었다.

이로써 양 떼는 영생, 곧 신적인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 목자이신 선한 목자가 하는 일이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계시하고 하느님의 영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조에의 생명을 얻게 하고, 십자가에서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그들의 죄를 씻어 버려서 그들을 의롭게 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서 하느님과 연합하게 하는 분, 바로 그분이 참 목자요 참 메시야다.

 

다윗 왕조를 단지 문자적으로 재건하는 이가 참 메시야가 아니고,

놀랄 이적들을 드러내는 이가 참 메시야가 아니다.

또한 모세의 출애굽 구원을 문자적으로 재현해서 로마의 가이사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는 이가 참 메시야가 아니다!

당시 암흑의 절대군주시대에 대항하여 정의구현의 실현을 위하여 백성을 선동한 계몽주의자가 참 목자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계시하고,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 통치 아래 살게 하고, 하느님의 성령을 가져다주어 하느님의 생명을 얻게 하는, 십자가의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서 자신의 내어 줌, 곧 이분이 참 목자시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이다!

하느님의 사랑만이 치유의 힘이 있다!

초월자 하느님의 사랑만이 피조물의 모든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

 

요한 사도는 진정한 구원이란 서양의 인본주의적 지혜나 쇄국적인 동양 사상이나 변질된 해방신학 따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 바로 위에서 온 계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도 1코린 1-2장에서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말씀을 대조하면서, 세상의 지혜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헬라 지성인의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고 무능함의 상징인 십자가의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지혜요 능력이라고 말한다.

 

알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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