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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4-29 조회수1,085 추천수4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4월 28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My sheep hear my voice;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I give them eternal life.
(Jn.10,27-28)
 
 
제1독서 사도 11,19-26
복음 요한 10,22-30
 

어떤 학생이 선생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사랑해요’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선생님께서는 “‘미워해요.’인가? 아니면 ‘싫어해요.’인가?”

학생은 “아니에요. 답은 ‘사랑했어요.’예요. ‘미워해요, 싫어해요.’는 그래도 관심을 나타내지만 떠난 사람은 아무런 관심도 없잖아요.”라고 웃으며 말하더랍니다.

무관심이 사랑의 반대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잘 알겠지만, 이 무관심이 역사를 바꾼 적도 있었습니다.

군중들을 격분시켜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루이 16세 프랑스 왕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이 결정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가난으로 먹을 것이 없어 힘들어하는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가난에 대한 무지, 그리고 무관심이 결국 그녀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무관심이 역사를 바꾸었으며, 한 여성을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지금 현재의 삶 안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 사랑과 반대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조차 힘들다며 아예 관심을 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 대상은 멀리 있는 사람이나 잘 모르는 사람도 아닌, 피를 나눈 가족관계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물론 이야기를 들어보면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이렇게 무관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해줄까요?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요? 내 무관심의 대상을 볼 때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뿐입니다.

사랑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무상의 사랑에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무관심으로 일관된 삶이 아닌, 사랑의 여지를 항상 두면서 살아가는 마음의 여유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유대인들은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대답하라고 요구하지요. 왜 예수님께서는 그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 행하셨던 표징만 하나하나 따져보면서 참으로 그리스도이심을 스스로 깨달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님의 모습에 자기 자리가 불안했겠지요. 이처럼 자신의 자리를 보존할 수 없도록 하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행동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우리를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는 구원의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있나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면 분명 이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알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믿는다(토마스 머튼).


바람이 있어야 도는 바람개비처럼, 우리 역시 주님이 있어야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본 회퍼)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나는 감방에서 걸어나올 때
마치 왕이 자기의 성에서 걸어나오듯
침착하고, 활기차고, 당당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나는 간수에게 말을 건넬 때
마치 내게 명령하는 권한이라도 있는 듯
자유롭고, 다정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또한 말하기를
나는 불행한 날들을 견디면서
마치 승리에 익숙한 자와 같이
평화롭고, 미소 지으며, 자연스럽다고 한다.

나는 정말 다른 이들이 말하는 그런 존재인가,
아니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게 뭔가를 갈망하다 병이 들고
손들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듯 숨 가쁘게 몸부림치고
빛깔과 꽃들과 새소리를 갈구하며
부드러운 말과 인간적인 친근함을 그리워하고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로 치를 떠는,

그리고 위대한 사건들을 간절히 고대하고
저 말리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다 힘없이 슬퍼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글쓰는 일에 지치고 텅 빈,
무기력하게 그 모든 것과 이별할 채비를 갖춘 그런 존재.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인가.
아니면 동시에 둘 다인가.
타인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약자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신은 안다.
내가 그의 것임을..

나치에 항거했던 행동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베를린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기 전에 쓴 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정확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면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지요. 본회퍼 목사님의 말씀처럼 ‘타인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약자’일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런데 확실한 것은 그 모든 나를 하느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본 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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