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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4-29 조회수1,076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I came into the world as light,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me might not remain in darkness.
(Jn.12,46)
 
 
제1독서 사도 12,24─13,5ㄱ
복음 요한 12,44-50


스포츠 세계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고 합니다.

“스타는 감독으로 성공하기 어렵다.”

물론 스타로 이름을 알렸던 사람이 감독으로도 성공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명감독의 경우는 대부분이 선수 시절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스타일을 선수들이 따르도록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의 스타일이란 무엇일까요? 정말로 잘했던 예전의 자기 모습인 것이지요. 실력이 뛰어난 사람의 경우는 그 방법을 잘 따라오겠지만, 평범하거나 또 그보다 못한 사람의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하면서 좌절하고 포기하게 되지요. 하지만 선수 시절에 주목받지 못했던 감독은 선수 개개인에 맞는 방법을 찾기 때문에 감독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맞추느냐, 아니면 상대방에게 맞추느냐에 따라 명감독과 형편없는 감독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맡은 선수들의 역량을 키워줄 수도 또 반대로 억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사랑하며 잘 살기를 원하시지요.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떨어트리고 대신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 살아남아서 이 세상을 더욱 더 발전시키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이 세상을 잘 살고 있으며, 죄가 있든 없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차별하고,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제외하면서 판단하고 단죄할까요? 이 모습이 분명 주님의 모습은 아닌데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심판만 하려고 합니다. 이 모습이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의 믿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의 모습은 아닐까요? 결국 이 모습은 스스로를 단죄하게 되어, 먼 훗날 하느님의 판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내가 기준이 아닌 ‘너’에 기준을 둘 때입니다. 그리고 ‘나’에서 벗어나 내 이웃을 향한 마음이 가득할 때, 그 마음을 통해 구원을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마치 향수를 뿌리는 일과 같다. 이때 당신에게도 몇 방울 묻는다.’

우리 모두가 좋은 향기를 품는, 즉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 품는 거룩한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겠습니다.

사랑이라는 마음을 주는 것은 그 사랑의 아픔과 어둠까지도 껴안을 수 있는 넉넉함을 가졌을 때만 가능하다(전경린).


제가 좋아하는 스포츠인 야구.

 

게(이시카와 다쿠보쿠)

동해 바다 작은 섬 갯바위의 흰 백사장
나 눈물에 젖어
게와 놀았다네.

별 의미 없는 시처럼, 아니면 그냥 낭만적인 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는 상당히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이 자살하려고 바닷가에 나갔다가 흰 모래사장 위의 작은 바닷게 한 마리에 눈이 팔려 그 게와 놀다가 자살할 마음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게는 시인에게 희망인 것이지요. 사실 작은 게 한 마리. 쉽게 볼 수 있으며, 그래서 하찮은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생명을 살리는 결정적 계기를 주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주변을 보면 나를 살리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나를 살리는 것은 물론이고 더욱 더 잘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만날 수 있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나를 죽이는 것만을 바라보고, 또 그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이웃을 계속해서 보내십니다. 그 이웃은 사람이 될 수도, 아니 생명체가 아닌 어떤 물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봐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것들을 볼 때에야 비로소 희망을 볼 수 있으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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