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젊은이의 손에 든 묵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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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순아 | 작성일2015-05-03 | 조회수4,795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긴 머리칼을 날리며 바삐 걸어오는 한 여대생의 손에 묵주가 들려있었습니다. 십자가가 묵주 중간 쯤 달려 있는 것을 보니, 어떤 신비인지는 몰라도 기도를 3단쯤 바친 것 같았습니다. 참신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순간 성모님께서 그 젊은 자매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성모성월을 맞으며 성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산책길에 그 여대생이 내 마음에 작은 겨자씨 한 알을 뿌려준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바치는 묵주기도 20단중 오후 다섯 시 쯤 바치는 묵주기도는, 언제나 ‘고통의 신비’입니다. 왜 이 시간에 고통 받는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돕니다. 그리고 이 시간만큼은 새벽이나 늦은 밤 같이 졸지 않고, 그들을 위해 마음모아 기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매월 첫 금요일 봉사를 하기 위해,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을 가려면, 서대문 지하철역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어느 금요일 이른 아침 지하철에서 내려 역 입구에 올라서니, 눈에 들어오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노숙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외모는 장기노숙자로 비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청년이 토스트 한 쪽을 들고 먹을 장소를 두리번거리고 찾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불행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이 자주 눈에 띠었습니다. 더구나 아들 친구가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고도 그 고통에 굴하지 않고, 방송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나, 결혼도 하지 않은 친구 딸이 암에 걸려 투병을 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생각하면, 그때마다 자연히 묵주를 손에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비탄에 젖어 있는 성모님을 생각하면서, 불행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의 어머니들을 생각하면서..., 이런 작은 나눔의 마음을 굽어 보셨음인지, 성모님께서는 오랫동안 바쳤던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한 묵주기도의 응답을, 올 해 사제 첫 미사 때 이렇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심경을 그대로 써 놓은 글을 함께 올립니다. 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립니다. 이 단순한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제 글을 읽어 주시고 공감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 삶의 그 자리에서 그 긴긴 세월을 때로는 하느님을 부둥켜안고 때로는 자신을 부둥켜안고 위기에 위기를 넘긴 네 분 새 사제들이 돈 보스코 성인의 제자 되어 오늘 살레시오회 수도원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이 태석 신부님이 투병하던 낡은 수도원 건물을 뒤흔들고 새 사제들의 가슴을 뒤 흔들고 뒷자리에서 미사참례를 하던 어머니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불우한 청소년들! 그들의 아픔과 슬픔이 고통과 인내가 승화되어 절정의 화음을 이루는 순간! 예수님도 성모님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시는 것 같았다. 돈 보스코 성인의 뒤를 따라 너희들과 일상을 함께하며 너희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며 살겠노라고 선포하는 새 사제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성가정의 모범이신 성모님과 요셉성인은 ‘장하고 장한 내 아들들’이라고 격려하며 그들이 지고 갈 십자가에 형광 빛 옷을 입히시는 것 같았다. “고통 받는 젊은이들의 기쁨이 되고 실망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의욕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힘이 되며 헤매는 젊은이들에게 빛이 되게 하소서.” 하는 신학생과 수사님들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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