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5-11 조회수1,392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5월 11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When the Advocate comes
whom I will send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to me.
so that you may not fall away.
(Jn.15,26)
 
 
제1독서 사도 16,11-15
복음 요한 15,26─16,4ㄱ
 

제가 사제로 살아오면서 웬만해서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대신 해야 할 것 또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불가능은 없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내 자신의 잠재력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늦게 접해서 어수룩하고 부족할 뿐이지 그것을 해 나가는 과정 안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 중에 고인이 되신 박완서 선생님이 계십니다. 선생님께서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비로소 작가가 되셨지요. 만약 보통 사람들처럼 ‘마흔이 넘었으니 이제 늦었어.’라면서 포기하셨다면, 그분의 아름다운 글은 이 세상에 빛을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늦은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았을 뿐임을 아셨기에, 남들이 보기에 늦었다고 할 수 있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등단하셨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왕성히 활동하셨습니다.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임을 떠올리면서 계속된 노력으로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음을 발견할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물론 내 자신의 잠재능력을 발견하는 노력이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서 남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하고 있는 것 자체를 부정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정하고 포기하는 내 모습을 주님께서 과연 좋아하실 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는 항상 새로운 삶을 이야기하셨지요. 세상의 관점에 묻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관점에 맞게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살라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보호자이며 협력자인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성령을 언급하시지요. 즉, 세상으로부터 내쫓김 당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보호자 성령을 이야기해주십니다. 성령이 보호자라고 불리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성령께서는 “주님께 바라라. 지금 너에게 일어나는 일은 작은 일이며, 네가 받을 상은 크다. 조금만 견뎌라. 그러면 너는 영원히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라고 힘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보호자 성령까지도 우리 편이 되어 큰 힘이 되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관점에 맞춰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관점에 맞춰 살아가는 새로운 나를 만들어 나가도록 합시다. 그런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잠재능력을 발휘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더욱 더 알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시간의 노예가 되어 시간을 우상처럼 숭배하게 됩니다. 시간을 성화하도록 합시다.


어떤 신부님께서 선물로 주신 저금통입니다. 예쁘죠? 이름도 지었습니다. 제니라고요... ㅋㅋ

 

다양한 나를 찾기.

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서울 대신학교 1년 선배를 만났습니다. 거의 20년 만에 만난 것이라 무척 반가웠지요.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빠다킹’이라는 제 별명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선배는 제가 빠다킹 신부인 것을 전혀 몰랐는지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네가 빠다킹신부였어? 네가 이렇게 바뀔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제 자신을 스스로 보아도 지금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지금과 다르다고 그때의 나를 부정할 수 있을까요? 그 당시의 소극적이고 말 못하고 글도 엄청나게 못 썼던 ‘나’ 역시 ‘나’인 것이지요.

이렇게 다양한 ‘나’가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 말은 앞으로도 다양한 ‘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 안에도 다양한 ‘너’가 있음도 인정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내 안에 숨겨 있는 다양한 ‘나’를 하나씩 꺼내 보시면 어떨까요? 삶이 더욱 더 풍요로워지고 재미있어지지 않을까요?


어느 본당의 성체조배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