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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생명의 성령의 통로/ (요한7,38; 갈라2,20)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5-05-16 조회수738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생명의 성령의 통로/ (요한7,38; 갈라2,20; 6,14-17)

 

<이 묵상은 그리스도의 몸의 회복을 위한 변증의 글이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고 사제들의 사역이 십자가의 체험과 생명의 통로가 되지 못하고, 단순히 인간의 지식이나 정치 사회적 신념이나 감상만을 만족시키는 데 그치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죄악이다!

생명나무가 아닌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일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귀적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7,38).

이 성경 구절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 곧 사역자는 생명, 곧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그 속에서부터성령이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그 속이 십자가의 완전한 역사를 통하여 비워져야만 한다!

또한 그 속에서는 성령의 생수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그의 속에 있는 그 생명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생명은 너무나 풍성하고 충만하여 생명수의 강같이 흘러 넘쳐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할 수 있으며, 생명의 성령의 통로가 되기 위한 절대 조건이다!

 

이 말씀에서 특별히 흘러나오다” “흐르다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말은 사역자의 화법이나 거룩함을 흉내 내는 어조나 심층 심리학이나 웅변이나 논설이나 학문 등의 사용을 암시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때때로는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생수도 아니고 생수가 솟아나게 하는 기구도 아니다.

흐르다라는 말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을 암시한다.

이런 일은 자기 노력이나 의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가장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이런 일은 웅변이나 거룩하게 보이는 어조나 재미있어 보이는 구절의 인용이나 논설에 의존할 필요가 전혀 없다.

 

성령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체험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지 않으실 것이다!

루카24,48-49절에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후에 행하는 일은 증언(간증)의 성격을 지닌다.

 

증언(간증)하는 사람은 자기가 보지 못한 것을 증언할 수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선포하는 사람은 거짓 증인이 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성령은 그런 사람들과 일하기를 거절하신다.

성령의 체험이 없는 사람이 아무리 열정적으로 강론(설교)을 한다고 해도, 심지어 청중들이 아무리 집중해서 듣고 감동을 받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그들의 입술에서 칭찬을 자아낼 뿐, 들은 바를 실행할 수 있는 생명과 능력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 곧 사역자의 조건이란 바로 하느님의 생명을 전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고 양육시킬 생명이 우리 안에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단지 생명의 통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생명은 우리를 통하여 흘러 나간다!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막혀서는 안 된다. 수로가 막히면 물이 흘러 나가지 못하듯이,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과할 수 없게 된다.

 

십자가의 역사만이 우리를 열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역사는 우리에게서 아담에게 속한 것과 육신적인 요소를 모두 씻어 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생명의 성령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성령으로 충만해짐으로써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계속적으로 지닐 수 있다!

그 결과 우리의 생명은 십자가의 생명이 된다! 알렐루야!

 

일단 성령 충만을 받고 십자가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 쓰임을 받게 된다. 곧 우리에게서 십자가의 생명이 발산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퍼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십자가의 역사가 더욱 깊어짐으로써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 충만하게 되면, 자연히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우리의 대화나 이야기에서 그 생명을 발산시켜 우리와 접촉하는 사람들을 부유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자기 노력이나 의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성령이 일하실 때 필수 조건은 사람이 그 능력의 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선포할 때에는 성령께서 그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전달하는 통로로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포하는 그 십자가에 우리가 못 박혀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그 십자가를 우리가 져야만 한다!

우리가 타인들에게 나누어 주려는 그 생명을 먼저 우리가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선포하는 그 십자가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날마다 경험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영원한 결과를 가져오려면, 먼저 그것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상생활의 시련을 통하여 그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존재에 아로새겨질 때 우리는 모든 행동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게 된다.

갈라6,17절에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곧 자기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자만이 예수님을 선포할 수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여기서 일깨워 주고자 하는 큰 부담은, 책이나 연구나 사상이나 주의나 신념이나 지식은 일시적으로 청중들을 매료할 수는 있어도 영원한 감명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고 사제들의 사역이 십자가의 체험과 생명의 성령의 통로가 되지 못하고, 단순히 인간의 지식이나 자기들의 사회 정치적 신념이나, 감상만을 만족시키는 데 그치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죄악이다!

생명나무가 아닌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일뿐이다!

생명이 아닌 것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귀적이다!

 

불행히도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도처에서 이 죄악들이 스며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십자가의 생명을 전하지 못하는 무자격의 사역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말씀의 전례는 한심한 읽기 수준이며, 강론은 사회교리를 빙자한 너무 정치 사회적이며, 살아있는 말씀은 깊이가 없고 흉내만 내고 있다고 내가 말한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인가?

(물론 사제에 따라 예외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왜 이 지경이 되고 있는 것일까?

 

사실 교회는 물질적인 요소가 90%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세상적인 요소들(, 건물, 권위, 의식, 모양 등)90%까지 침투되어 있다는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회복이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몸이란 유기적인 생명체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곧 너무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오늘날의 교회를, 생명이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생명의 성령의 유기체이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너무나 미약하지만, 속수무책의 무기력한 방관자의 자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의 회복을 위하여 주님께서 나에게 구체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소위 해방신학에 물든 정의구현사제단들의 이단적 인본주의가 세상에 회자되고 있을 때,

어느 가톨릭 평신도의 하느님 말씀 묵상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 하실 것!)

 

십자가의 메시지는 바오로 사도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바오로의 생명은 분명히 십자가의 생명을 나타냈다!

그는 십자가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삶을 살았다. 그가 선포하는 십자가는 자신이 매일 몸소 체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십자가를 설교할 때에는 그 설교에 자신의 경험과 증언(간증)을 첨가시킬 수 있었다.

 

바오로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깨닫고 있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십자가로 짊어졌다!

갈라2,20절에서 바로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고,

갈라6,14절에서는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바오로의 편지들을 읽어보라!

당신의 영으로 기도하며 읽어보라!

바오로의 온화함, 인내, 유약함, 눈물, 환난, 결박, 매맞음, 고난, 이 모든 것들이 십자가의 생명을 나타냈다. 바오로는 십자가를 체험하며 살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설교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바오로처럼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실제로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가?

 

바오로는 실제 삶에서 복음을 체험하며 살았기에 복음을 전함으로서 많은 영적 자녀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십자가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인들의 가슴 속에 그 십자가를 재생산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바오로가 사람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었든 이유는 그의 삶이 곧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담에게서 온 악한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십자가로 나아갔으며, 또한 십자가를 자신의 생명으로 취하여 날마다 그것을 지고 살았다!

날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터득했으며, 날마다 주 예수님의 생명을 나타냈다!

! 사랑하는 바오로 형제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대부분의 우리는 나는 십자가는 싫어요! 고난은 나에게서 멀어지길!’ 기도한다고 한다!

크게 잘못되었다!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가?’

이것을 깨닫기 위하여,

이제 성경을 통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성령으로 회복된 복된 삶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시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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