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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5-19 조회수1,468 추천수14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5월 19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I glorified you on earth
by accomplishing the work
that you gave me to do.
(Jn.17,4)
 
 
제1독서 사도 20,17-27
복음 요한 17,1-11ㄴ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작가인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의 글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그 분량에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곧 현명한 사람은 큰 불행도 작게 처리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작은 불행도 현미경처럼 확대하여 스스로 큰 고민에 빠진다.”

이 글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과연 현명한 사람인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사실 어제 저는 커다란 실수 하나를 했습니다. 새벽 묵상 글에 그날의 복음과는 다른 내용의 글이 올라간 것입니다. 그 내용은 5월 25일의 새벽 묵상 글 내용이지요. 원래는 당일에 묵상을 해서 올리지만, 오늘 평화방송 라디오에 ‘오늘의 강론’ 녹음이 있는 날이어서 제 방송분량인 5월 25일부터 30일까지의 묵상 글을 미리 써 놓았거든요. 그런데 실수로 25일 것을 올린 것입니다.

어제 오후가 되어서야 다른 분들이 올려주신 댓글을 통해 저의 실수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그러면서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서두르다보니 또 커다란 실수를 했습니다. 두 개의 컴퓨터를 통해서 작업을 하는데, 이쪽의 묵상 파일을 다른 컴퓨터로 옮겨 작업을 하는 도중에 옛날 묵상 파일로 덮어쓰기를 한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 평화방송 녹음을 위해 미리 써놓았던 묵상 글이 모두 사라지고, 2015년 5월 12일까지의 묵상 글까지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 저는 어떠했을까요? 소위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용어인 ‘멘붕상태(멘탈 붕괴)’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책함과 동시에(다른 누군가가 일부러 한 것은 분명히 아니니까요)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한 화가 너무 났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책을 하고, 또 화를 낸다고 해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곧바로 ‘그때의 글이 좋지 않았나 보지. 다시 쓰라는 하느님의 뜻인가 보다.’라면서 다시 묵상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또 만약 방송 당일 날인 오늘 아침에 확인했으면 대처 할 시간도 부족했을 텐데 미리 발견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책하는 것, 또 화를 내는 것. 모두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 나갈 때 비로소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기도에 있어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바치는 기도를 한 다음에 자신의 일을 말씀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나의 일을 분주하게 나열하는 것으로 그칠 때가 더 많지 않습니까? 부정적인 생각, 그리고 마음에 가지고 있는 답답함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의 모습을 따라, 내 마음을 먼저 하느님을 향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면 나의 일들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늘 감사의 모습으로 기쁘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햇빛은 달콤하고, 비는 상쾌하고, 바람은 시원하며, 눈은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서로 다른 종류의 좋은 날씨만 있을 뿐이다(존 러스킨).


묵주기도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하늘을 보고 싶더군요.

 

흉내라도 내 봅시다.

옛날에 한 불효자가 상을 받으려고 효자 흉내를 냈습니다. 임금이 그에게 상을 주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요.

‘그 사람은 원래는 엄청난 불효자인데, 임금님께 상을 받고자 효자 흉내를 낼 뿐입니다.’

그런데 임금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는 상을 줬다고 합니다.

“효도는 흉내를 내어도 잘 하는 것이다.”

본심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흉내를 내는 과정 안에서 분명히 마음에 느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도 비로소 깨닫게 되겠지요. 그런 차원에서 흉내를 내어도 잘 하는 것이라면서 상을 준 임금의 판단은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효도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의 실천 역시도 이러한 흉내를 통해서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진정성이 떨어져 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흉내 내는 과정 안에서 분명히 주님의 뜻에 조금이라도 다가서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새집에는 누가 살까요? 쓰레기만 살더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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