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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미사)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5-06-19 조회수898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미사)

마태 18,19-22. 에페 4,29-5,2; 2015. 6. 21.

 

오늘 복음은 둘이 땅에서 합심하여 청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과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두 말씀을 분리해서 알아들으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두 사람이 청하면, 하느님이 들어 주신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말씀은 서로 보완해서 의미를 발생시킵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하느님에게 청하되 그 합심의 동기가 예수님이라야 하고, 두 사람이 합심한 결과가 또한 예수님의 삶과 운명을 표현하는 것일 때, 하느님이 그들의 원의를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청하고 야훼라는 이름을 알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이름을 알려 주신 것은 당신을 부르는 백성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이 하느님을 부르면,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약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인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인 백성이고, 그 백성과 함께 하느님은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름은 그 인물의 활동과 운명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문화권에서도 사람의 이름은 존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부르면서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의 운명을 자기들 생활의 지표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어떤 양식으로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들을 보면,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이 단편적으로 보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복음은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자비와 어떤 용서인지를 가르쳤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걸핏하면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고, 성전에 십일조를 바치지 않아도 죄인입니다. 병들거나 불행을 당한 사람들도 모두 자기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하시며 용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 있어서는 전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죄인으로 판단되어 사형을 당하면서도 아버지 하느님을 부르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그렇게 죽였지만,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그 시대 로마제국 안에 급속히 전파되었습니다.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들은 자비와 용서로 채색된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을 표현하는데 용감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4세기 후반에 이르자 그리스도신앙이 로마제국의 국교(國敎)가 됩니다. 그와 더불어 교회도 그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었습니다. 4세기 말부터 시작된 소위 야만족의 이동이라 불리던 게르만족의 유럽대륙 내의 이주(移住)로 발생한 혼란의 와중에 로마 문화와 동일시된 그리스도신앙은 지배층의 종교와 문화가 되었습니다. 중세 봉건사회의 출현과 그것의 정착에 절대적 기여를 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그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면서 교회가 서서히 잃은 것이 예수님이 보여 준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 고치고 살리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사회의 질서(秩序)와 기강(紀綱) 확립을 위해서는 단죄와 벌이 더 효율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섬김보다는 다스림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인간이 구상해 낸 다스림의 언어 안에는 하느님이 사라져 갔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언어는 다스리는 자의 언어가 되면서 그리스도 신앙언어 안에 나타나는 것이 파문(破門), 조당(阻?) , 단죄의 언어들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과연 자비하고 용서하신 분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활동과 그분의 운명을 역사 안에 지속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비와 용서를 위한 힘든 노력이 조금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적대시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비극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도록 비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이씨조선(李朝) 말기에 조정(朝廷)은 당파 싸움으로 45열되어 서로 상대방의 발목잡기에 분주하였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회에서 우리는 그 유산을 보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세비 인상이나 국회의원을 한 번만 하여도 보장되는 평생연금 같은 것을 결의할 때만 그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그 외의 일에는 사사건건 서로 발목 잡는 일만 하고 있지요. 이씨조선 말기에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서방의 문물(文物)을 받아들여 국내를 정비하고, 국력을 보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무력으로 한반도를 점령하여 식민지(植民地)로 삼았습니다. 왕은 폐위당하고 왕자들은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고, 왕비는 궁내(宮內) 정원에서 일본 무사들이 불태워 죽였습니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 통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까지도 한국의 언론에 오르내리는 징용(徵用), 징병(徵兵),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의 군대(軍隊)위안부(慰安婦) 문제 등이 모두 일본식민지 시대에 이 땅에서 자행된 일들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말기, 그러니까 일본의 패색(敗色)이 짙었을 때,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연합군에 가담하였습니다. 몇 달 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소련은 세계 제2차대전의 전승국이었습니다. 연합국은 소련에게 일본의 일부를 내어주지 않기 위해, 조선을 이등분하여 북조선에 소련군이 진주하게 하였습니다. 미국이 점령했던 남한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가 탄생하고 북조선에는 김일성이 공산주의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5년 후에는 남침(南侵)을 감행했습니다. 미국이 중심이 된 연합군의 개입으로 남한은 공산화되지는 않았지만, 3년간의 전쟁 후 휴전 상태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후 도끼만행 사건, 천안함 침몰 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 등, 많은 사건들이 그 휴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

 

우리는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가도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이 분단으로 말미암은 아픔과 비극을 더 이상 겪지 않고, 하나의 민족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빕니다. 분단되면서 납북 간에 얽히고설킨 비극들이 많았습니다. 남한이 일방적으로 용서한다고 해결될 상황도 아닙니다. 남과 북의 통치자들이 선의(善意)의 협상을 거쳐서 이루어야 할 통일입니다. 분단 후 이미 50여년이 지났습니다. 민족의 동질성도 많이 훼손되어가고 있습니다. 남북 분단의 골은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남북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가져야 하는 희망이고, 아버지이신 하느님에게 마음모아 빌어야 하는 기도입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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