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서로에게 ‘타인’이라는 경계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투고 상처받는 이유도 서로의 마음을 서로가 몰라준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서로에게 타인일
뿐입니다.
그래서 상처는 더 아프고 힘듭니다. 이젠 상처받기 싫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에 뭐가 들어 있는지 관심 두지
않으렵니다.
적당한 경계를 이루는 이 ‘타인’이 너무나 고맙기까지 합니다.
어차피 저 사람도 제 마음을 궁금해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함께-있습니다’.
그걸 가정이라고 하고, 학교나 직장이라고 하며, 사회라고도 하고, 국가라고도 부릅니다.
어린 시절 수학 시간에 배운
벤다이어그램으로 표시해 보면, 부피가 커져 가는 것은 느껴지는데, 어우러진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차가운 숫자들의 집합처럼. 스마트폰이 주는
세계에 빠져 사는 요즘 사람들은 ‘옆에’ 있는 ‘타인’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내가 찾는 타인은 스마트폰에 있으니까요.
그러기에 옆에 있는
‘타인’은 있지만, 없는 존재입니다.
곁에 있는 타인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데, 과연 그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요?
2015년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이 유난히 무겁게 다가옵니다.
- 김태홍 신부(서울대교구
수유동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