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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에게 매우 특별한 묵상을 허락하셨다! 알렐루야!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5-06-28 조회수1,02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5628/주일복음말씀묵상/나에게 매우 특별한 묵상을 허락하셨다! 알렐루야!)

 

 

마르코복음 5,21-43절은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난 딸을 치유하신 사건이 언급되는데, 그 중간에 하혈하는 여자를 고치신 사건이 삽입되어 있다. 유대인의 주거지 안에 세워진 회당에는 10명의 관리인이 있었는데, 그 중의 3명이 회당장이었다. 회당장은 안식일마다 집회를 담당하거나 재판을 관장하였으며, 회당사용을 허가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사도13,15).

 

12년간이나 하혈하는 여인은 만성적인 혈루증 환자로서 끊임없이 피를 흘리거나 하혈처럼 정기적으로 피를 유출함으로써 혈액부족을 초래하여 건강을 결정적으로 해치는 당시에는 무서운 만성병이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은 부정한 질병이므로 병자는 물론 병자가 만진 것은 모두 부정하다고 여겨졌다(레위15,25-30).

그러므로 이 여인은 온갖 노력을 다 해 보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이 상태가 더 나빠져(26),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당하고, 남편으로부터도 이혼 당했을 법한, 죽음만을 기다리는 불행한 여인이었다.

 

이 말씀을 지난 몇 일간 수차례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면서, 주님께서는 나에게 매우 특별한 묵상을 허락하셨다! 그간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던 이 말씀이 뚫리면서 나는 너무나 기뻤고, 그 내용을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함께 말씀을 나누는 형제자매들이여!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하시기를!

 

첫째는 영적 실재(reality)란 무엇인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과 확신을 주신 것이다!

우리를 모든 실재로 이끄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영적 실재가 아니다. 곧 사람이 단순히 귀로 듣거나 생각하거나 감정에 휩싸여서 얻은 것은 영적으로 진실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누구든지 이 실재를 접하는 자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인데, 이 생명과 실재는 함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르5,27-31절은 그녀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 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느냐?’ 하고 물으십니까?”하고 말한다.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 두 부류의 사람을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예수님께 접촉한 사람이 있고, 그냥 그 둘레에 모인 사람이 있다!

후자는 육체적으로 그리스도께 모여들었을 뿐이나, 전자는 그리스도의 실재를 접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주님께로 밀려드는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시는 듯하나, 참으로 주님을 접한 사람들의 접촉은 반드시 알아채신다!

주님께 모여든 사람들은 많으나 진정 주님을 접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누가 그냥 둘레에 모여들고 있고, 누가 실재를 접하고 있느냐에 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6,63). 성령께 접한 사람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 성령께 속한 것은 생명이다. 실재를 접하는 것은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

책을 읽고 주님을 아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주님을 아는 사람도 있다. 실재하시는 그리스도는 책에서 읽거나 들어서 아는 그리스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이 그리스도는 오직 성령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다른 길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들의 믿음이 도무지 성장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그들의 불만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으며, 봉사도 많이 했고, 매일 묵주기도도 빠지지 않고 해왔고, 레지오 활동도 적극적이며, 교회의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는 모범적인 성도라고 남들은 말하지만, 정작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믿음에는 별 효과도 발휘되지 않고, 마치 믿지 않는 이들 모양 나이가 들수록 확신도 없고 허망하고 외롭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그들이 실재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능력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그를 만진 여인에게로 전해졌다. 오직 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접촉했다. 믿음의 활동 여부는 믿음이 실재에 접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물론 우리는 육신으로 계신 그리스도가 육신의 손과 눈과 귀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존재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만 접할 수 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도 이미 그를 외적으로 아는 것과 내적으로 아는 것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과거에 아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어느 날인가 우리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알아 영적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접한다면(만난다면), 바로 그날에 그리스도를 내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이 사실을 말하거나 설명할 수 없을지라도 이는 사실이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를 내적으로 알고 나면, 우리의 모든 의심이 해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에 대한 참된 지식 곧 인격적 접촉과 만남을 간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혈육의 지시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계시로부터 오는 앎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5,21-43절에서 마태오는 혈루병 걸린 여인의 치유사건(5,25-34)을 독립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회당장 아이로 딸을 다시 살리는 사건의 중간에 삽입하였다. 이것은 이 사건이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는 사건을 해석하는 어떤 중심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혈루병 걸린 여인의 치유사건과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는 공통적인 중심 역할이란 무엇일까?

당신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곧 인간의 고난과 죽음의 병은 율법으로 치유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치유가 가능하며, 바로 그분이 여기 오셨다는 것이다!

 

6,27-28절에 그녀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 앓는 병자가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은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려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믿음, 곧 그 여자가 나타내 보인 죽음에의 초조함(26), 그러나 모험적인 신뢰, 모든 장애를 극복하는 그녀의 절대적인 신뢰를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부르셨다(34).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녀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 여인의 전환점은 율법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병과 죽음을 이제 세상의 어떤 좋은 소식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 곧 복음을 듣고, 그 여인에게 생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고, 마침내 즉각적인 완전한 치유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말은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그 문제를 인간이 감당하느냐, 아니면 예수님께 철저하게 위임하느냐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경우 보통 7살까지는 어머니가, 8살부터 15살까지는 아버지가, 그 이상은 본인이 문제를 감당하게 된다. 12살 난 야이로의 딸은 아직 어리므로 그 딸의 믿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의 문제는 아버지의 믿음으로 해결된다.

 

회당장인 야이로의 히브리어 뜻은 빛을 발산하다는 의미이다.

22-23절에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율법이 근간인 유대교의 회당장인 야이로가 율법으로는 사랑하고 안스러운 어린 딸을 치유할 수 없음을 알고, 유대교 회당장의 자존심과 율법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간청함으로써 딸을 죽음에서 구한 것이다! 그는 빛을 발산한 것이다!

 

이 절박함에서 율법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죽은 딸을 살릴 수 있는 분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야이로가 깨닫았다!

그러나 이 짧은 순간에도 야이로의 믿음의 연단이 있었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35)라고 전했을 때, 예수님이 들으시고, “두려워말고 믿기나 하여라”(36-37)라고 믿음의 말씀을 주셨다!

 

절망적인 소식을 들은 야이로에게 확신을 주는 말씀이다. 곧 야이로에게 순간적인 믿음의 흔들림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믿음의 태도를 요구하시는 말씀이다.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 주님은 죽은 모든 사람들을 잠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것은 소녀가 잠시 기절한 상태라는 의미도 아니다.

소녀는 이미 죽었지만, 예수님은 다시 살릴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부활을 확신할 때 죽음은 일시적인 수면과 같다. 그러므로 성경은 부활을 확신하는 성도들의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고 있다(2베드3,4; 사도7,60).

 

야이로가 믿어야 했던 예수님은 단지 그의 딸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예수님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마르코의 기록 속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예수님을 예표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야이로에게 요구하신 두려워말고 믿기나 하여라라는 말씀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탱케하는 소망의 말씀이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참조 하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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