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에 따른 전례] 그레고리오 7세의 전례 개혁 8세기와 9세기 프랑크 왕국의 황제는 교회의 주교 임명이나 전례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전례를 통일하고자 노력했다. 당시 이탈리아 귀족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그리스도교 교회는 962년 오토 1세(재위 962-973년)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임명했다. 그러나 오히려 황제의 간섭에 직면하게 되면서 영적인 모습을 갖추기도 어려워졌고, 영적 가르침을 제대로 펼칠 수도 없었다. 전례도 지역마다 고유한 모습으로 발전하여 전례를 통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11세기에 교회는 황제의 통제에서 벗어나 교황권을 확립하고 고대 로마 전례를 중심으로 전례 통일을 이루는 개혁 운행을 전개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영적인 역할을 다하고자 함이었다. 성직매매 금지와 사제 독신 권장 교회 역사가들은 이 운동을 ‘그레고리오 개혁’이라고 지칭한다. 길게는 레오 9세 교황(재위 1049-1054년)부터 갈리스토 2세 교황(재위 1119-1124년)까지 이어진 개혁 운동이었다. 이 개혁에서 핵심 역할을 한 교황이 그레고리오 7세(재임 1073-1085년)이어서 그 이름이 붙었다. 교회 개혁의 핵심에 주교 서임 문제가 있었는데, 교회 역사학자인 장 콩비가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에서 설명한 당시 주교 서임 예식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주교의 봉토에는 영성적인 관할권과 세속적인 관할권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교직은 일종의 서임 예식(서임권)을 통해서 수여되었다. 영주는 자신이 선출한 주교 후보자에게 십자가와 반지를 수여했는데 이것은 평신도 서임이었다(세속적 서임). 그리고 일반적으로 대주교가 주교들을 항상 축성했다(영적 서임)”(431면). 영주나 황제가 선출하여 임명한 주교들의 자질 문제와 언제든지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면 주교직을 팔아치우는 성직매매가 이루어졌다. 또한 초기 교회의 니콜라오스파(묵시 2,6. 14-15 참조)처럼 자신의 결혼 생활을 정당화 하려한 사제들이 있어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사제들의 혼인과 독신에 관한 교회법이 항상 분명하지는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니콜라오 2세(재위 1059-1061년)는 1059년에 로마 교회 회의에서 성직매매와 사제 결혼 금지를 언급했으며, 문란한 사제들의 성무 활동을 금지시키고 사제들의 올바른 생활을 강조했다. 알렉산데르 2세(재위 1061-1073년)도 성직매매를 금지하고 사제 독신을 장려했다. 앞선 교황들의 개혁 노력에 더하여 그레고리오 7세는 평신도 서임권을 모든 악의 뿌리로 보고, 1075년 교황 훈령 27개 항을 통해 평신도 서임권 반대를 천명하며 교황권을 강화시켰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전례 개혁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 생활을 어렵게 하는 또 다른 해악, 곧 전례 실천에서 금욕적인 측면을 눈에 띄게 완화하려는 경향을 없애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전례 역사학자인 엔리코 카타네오는 그의 저서 「서양의 그리스도교 예배」(Il Culto Cristiano in Occidente)에서 그레고리오 7세의 전례 개혁은 세 가지 목표를 지향한다고 밝힌다. 첫째, 교황 권한의 확립, 둘째, 고대 로마 전례로의 복귀, 셋째, 신자들의 양성과 교육이다. 교황 권한의 확립 그레고리오 7세는 모든 서방 교회가 로마 전례를 사용함으로써 모교회의 진리에 대한 존경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로마 전례 사용 준수는 잘 유지되어야만 했다. 교황은 프랑크왕국 시절, 로마 전례가 게르만화되어 슬퍼했다. 고대 로마 전례로의 복귀를 지향하는 전례 통일화를 이루려면 교황 권한 확립이 필수적이었다. 교황은 당시 전례에서 게르만적 요소를 선별하여 제거함과 동시에, 스페인 교회에 모자라빅 전례 사용을 제한하고 로마 전례를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스페인 교회는 이 권고를 받아들였고, 고유한 모자라빅 전례가 점차 사라지며 로마 전례로 바뀌어 갔다. 구체적으로 미사 때 감사 기도에서 주교가 아닌 교황만 언급하는 이탈리아 관습을 다른 교회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또한 주교 서품 준비 예식에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을 추가했다. 고대 로마 전례로의 복귀 그레고리오 7세에게 고대 로마 전례는 프랑크왕국에서 게르만화되기 이전의 전례를 뜻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간편하게 바뀌어 나날이 세 편의 시편과 세 개의 독서로 충분했던 당시 아침 기도를, 고대 로마의 시간 전례 배치대로 되돌렸다. 또한 고대 로마 전례에서 행하던 토요일 단식을 부활시켰다. 1078년 로마 교회 회의에서 교황은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토요일은 우리의 거룩한 조상들 사이에서 금욕 생활의 습관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의 권위에 따라 누구든지 그리스도교 신앙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날에, 큰 축제가 있거나 환자인 경우가 아닌 한 고기의 섭취를 삼가해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사순절을 확대한 칠순절 전례에서 알렐루야 경구를 제거했고, 육순절과 오순절이 예식서에 추가되었다. 사순절과 오순절에 고대 로마 예식이 복원되었으며 전례 거행과 단식이 재결합되었다. 개혁은 모든 교회 규범이 초기 교회의 금욕주의와 분명한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에서 기인했다. 신자들의 양성과 교육 교황에게, 신자들의 정기적인 전례 참여는 하느님의 법에 순종하는 삶을 보장하는 길이었고 전례 참여 감소는 확실한 방종의 시작이었다. 카타네오는 당시 신자들의 전례 참여를 증진시키려는 양성과 교육에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 한 가지 원인은 카롤링거 시대부터 전례 행위에서 성직자의 우월성이 강조되었기에, 신자들이 점점 수동적인 보조자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다른 한 가지 당시 신자들은 충분히 교육받지 못하여 전례 이해가 부족한 문제가 두드러졌으며, 교육의 장인 성직자들의 설교와 강론이 충분한 준비와 연구 없이 미흡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레고리오 7세의 전례 개혁은 전반적인 교회 개혁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교황권 확립을 바탕으로, 고대 로마 전례로의 복귀를 중심으로 통일화를 의도했으나 성직자 중심으로 전례가 이루어진 시대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는 점점 더 요원해졌다는 사실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안셀모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1년 11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