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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7-24 조회수1,537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The seed sown on rich soil
is the one who hears the word and understands it,
who indeed bears fruit
and yields a hundred or sixty or thirtyfold.
(Mt.13,23)
 
 
제1독서 탈출 20,1-17
복음 마태 13,18-23
 

사람들이 제게 어떻게 새벽 묵상 글을 쓰게 되었는지를 자주 묻습니다. 아마 2001년부터 너무 오랫동안 써왔기에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겠지요. 사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영적 성장을 위한다는 등의 사목적 이유로 묵상 글을 쓰겠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2001년 컴퓨터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교회를 벗어나서 사회 안에서 생활하다보니 기도에 집중할 수 없었고 그러면서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제가 신부인지 프로그래머인지에 대한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되었거든요.

사제로 살겠다는 간절한 마음에, 매일 영성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매일 새벽에 일어나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벌써 15년째가 되었습니다. 지금 역시 이 묵상 글을 쓰고 있으며, 이로 인해서 ‘빠다킹’이라는 이름이 제법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묵상 글을 모아 책까지 출판하면서 누구는 제게 ‘작가’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십니다. 글 쓰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사제로 살겠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시작했던 것이 뜻밖의 제 모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문득 그 당시에 간절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을 해 봅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간절함이 또 다른 나를 만들 수가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필요한 것은 이러한 간절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이끄시는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주 우리는 지금의 자리에서 주저앉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주저앉도록 만든 환경에 대해 불평불만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다양한 종류의 토양은 믿는 이들의 영혼이 가지가지임을 나타내고 있지요. 길가, 돌밭, 가시덤불이 자라는 나쁜 땅의 모습을 갖춘 영혼이 있는 반면에,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맺는 좋은 땅의 모습을 갖춘 영혼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땅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좋은 땅은 소위 토양이 좋은 땅을 이야기하지요.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토양이 좋을 수도 있지만, 모든 땅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도록 하는 박토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좋고 기름진 땅을 만들기 위해서 퇴비를 뿌리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 역시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로 상징되는 나쁜 땅의 모습을 갖춘 영혼으로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옥토의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는 모습, 그리고 이 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모습. 바로 내 영혼을 좋은 땅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램프의 불빛을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우리는 램프에 기름을 계속 넣어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의 메시지를 듣길 원한다면, 지속해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야 합니다(마더 테레사).


어제 복날이었지요. 그래서 특별히 복날음식을 먹었습니다.

 

연대책임

학창 시절에 연대책임이라는 것을 물어서 단체기합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다른 친구의 잘못으로 책상 위에 올라가 걸상을 들고 있을 때도 있었고 매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히 억울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단체기합을 받게 했던 그 친구를 외면하거나 왕따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체기합의 주인공인 그 친구가 전혀 뉘우치지 않고, 똑같은 이유로 또다시 단체기합을 받게 되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항상 따뜻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문제는 전혀 뉘우침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뻔뻔함은 아닐까요?

죄의 반복을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 죄를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들의 정성어린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 때입니다.


성적으로만 줄을 세우려는 모습.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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