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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황님 미사강론]"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으로 복음을 선포하라."(7월 7일 화요일)
작성자정진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5-07-28 조회수1,291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으로 복음을 선포하라.


http://www.news.va/en/news/pope-francis-evangelize-with-the-gospel-of-joy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5.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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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15년 7월 7일 화요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강론 당일 매일 미사 말씀] 제1독서: 창세기 32,23-33


                      화답송 : 시편 17(16),1.2-3.6-7.8과 15(◎ 15ㄱ 참조)


                      복음: 마태오 복음 9,32-38


http://info.catholic.or.kr/missa/?missaid=6680&gomonth=201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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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7  바티칸 라디오 (Vatican Radio) 


  (바티칸 라디오) 키토(Quito:에콰도르 수도)에 있는 비센타나리오 공원(Parque Bicentenario)에서 집전된 “민족들을 위한 미사”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치와 독립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말했습니다. 교황 성하는 최후의 만찬에서 전하신 일치를 위한 예수님의 외침에 대해 말했고 오늘의 전례에서 기념한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향한 외침에 대해 말했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 외침이 복음화라는 아름다운 과제 아래에서 함께 결합된다고 보고 싶습니다.” 교황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는 거창한 말이나 복잡한 개념이 아니라 ‘복음의 기쁨’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다음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의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입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키토 비센타나리오 공원


2015년 7월 7일 화요일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이 믿도록, 우리가 하나가 되어 살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전하셨던 조용한 그 말씀들이 우리가 비센타나리오 공원에서 봉헌하고 있는 이 미사에서 울려 퍼지는 외침, 간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공원이 기념하는 200년제는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향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의 결핍에 대한 인식과 착취와 약탈과 “권력자의 편의에 번번히 휘둘리는”(복음의 기쁨, 213) 것을 인식하여 울려 퍼진 외침이었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 외침이 복음화라는 아름다운 과제 아래에서 함께 결합된다고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거창한 말이나 복잡한 개념이 아니라 ‘복음의 기쁨’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들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1) 예수님과 함께 여기 식탁에 앉은 우리 자신이 바로 그 간청이며 그분의 현존이 “수평선 너머 아름다움을 향하며 다른 이들을 맛있는 연회로 초대하면서”(복음의 기쁨, 15) 우리를 일치로 이끄신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외침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올리셨던 기도였습니다. 이 간청은 선교의 맥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가장 나쁜 이 세상,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분께서 지극히 사랑하셨던 세상을 겪어 내고 계셨습니다. 그 음모들, 그 거짓됨, 그 배신들을 전부 다 잘 아시면서도 그분은 돌아서지 않으셨고 불평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날마다 전쟁과 폭력으로 찢기는 세상을 만납니다. 분열과 미움이 단지 국가와 사회의 단체들 사이의 싸움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차라리 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우리를 분열시키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만연한 개인주의’(복음의 기쁨, 99 참고)의 발현이며 인간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상속이 드러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 사회와 모든 피조물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가져 옵니다. 우리는 냉담함으로 응답해서는 안되며 우리에게 일을 해낼 자원이 없다고 불평하거나 문제들이 너무 크다고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외침을 받들고 일치를 이루는 은총과 과제를 받아 들임으로써 응답해야 합니다.  


200년 이상 계속된 자유를 향한 그 울부짖음 안에 힘과 확신의 부족이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이들을 일단 제쳐 두면 역사는 권력을 향한 열망으로, 그리고 그로 인해 아직 대립하지 않는 다른 해방의 움직임들을 보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오직 전진했다고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의 선포는 우리의 희망과 근심, 이상, 그리고 유토피아적인 관점까지도 일치하게 해 주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으며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외침으로 만듭니다. 나는 이미 말해 왔습니다. “우리의 세상에서, 특히 일부 나라들에서 전쟁과 충돌의 다른 형태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중재하고 관계를 강화하고 ‘서로 남의 짐을 져주려고’(복음의 기쁨, 67) 하는 믿음을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일치를 향한 열망은 기쁘고 위안을 주는 복음 선포의 기쁨을 내포하며 우리가 함께 나눌 가득한 보물을 갖고 있으며 그 보물은 우리가 나눔으로써 커지며 다른 이들의 요구에 더욱 민감해 진다는 확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측면에서 포용하기 위해 일할 필요가 있으며 이기주의의 형태들을 피하기 위해, 소통과 대화를 구축하기 위해, 협력을 촉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의심이나 불신을 떨치고 우리의 길동무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다른 이를 신뢰하는 것은 손수 일구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도 손수 일구어 내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244). 권력과 명성, 쾌락, 또는 경제적인 안정에 대한 헛된 추구 속에서 영적 세속화가 우리를 반목하게 한다면 우리의 일치는 좀처럼 우리 앞에서 빛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그러한 일치는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라고 하셨던 사명의 실천입니다. 복음화는 개종시키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복음화는 우리의 증언으로 멀리 있는 사람들을 이끄는데 있으며 하느님과 교회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두려워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는데 있으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도 당신 백성의 일원이 되라고 커다란 사랑과 존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복음의 기쁨, 113). 


구원의 성사로서 교회의 사명은 또한 이 땅의 모든 민족들을 껴안도록 부름 받은 나그네 민족으로써 교회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친교가 깊을수록 우리의 선교는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Pastores Gregis, 22). 선교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친교를 강화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선교는 단지 봉사 활동과 관련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교회가 밖으로 나아가고 따뜻하게 맞이하는 집이며 끊임없이 선교하는 친교의 학교라는 것을 보여주며 교회 안에서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Aparecida Document, 370).  


예수님의 기도는 그분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인식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의 영성 생활은 이 심오한 진리에서 나옵니다. 이는 위안을 주는 몇몇의 종교적인 훈련들과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만남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록 우리를 이끌고 이 세상 안에 투신하며 복음화를 위한 열정을 쏟도록 우리를 이끕니다(복음의 기쁨, 78).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과의 친밀함은 친교와 소통, 자기를 내어줌과 사랑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일치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면적이면서 누군가를 초대하는 화합”입니다(복음의 기쁨, 117). 성 목요일을 기념할 때마다 일치를 이루는 우리의 풍요로운 차이와 다양성은 우리가 전체주의적이고 이념적이고 종파적인 모든 체제를 경계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누가 속할 수 있고 그럴 수 없는지 조건을 설정하고 선택하면서 우리의 의지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일치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형제, 자매가 되는 커다란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이것은 같은 취향, 같은 관심사, 같은 은사를 갖는 것과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온전히 그분 자신의 뜻에 따라 운명 지으시고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도록 하셨기에 우리는 형제, 자매입니다(에페소서1,5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시므로 우리는 형제, 자매입니다. 계십니다. 우리가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므로(로마서 5,9 참조), 우리가 죽음을 지나 생명으로 나아가 약속에 따른 “공동 상속자”가 되었으므로(갈라티아서 3,26-29, 로마서 8,17) 우리는 형제 자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능하게 해 주신 구원이며 따라서 교회는 기쁨으로 거룩해진 “우리”의 일원이 되라고 선포합니다.  


이 나라의 자유를 향한 최초의 외침과 관련이 있는 이 장소에서 우리의 외침은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고린토전서 9:16)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따라 공명합니다. 독립을 위한 외침이 긴급하고 절박했듯이 외침의 모든 부분이 그러합니다. 그 열정 면에서도 그것은 동일하게 감동적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빛나는 형제애에 기반한 친교를 증언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우리가 서로 얼마나 보살피고, 서로 얼마나 격려하고 돕는지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며 바라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은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건”을 주지 않고 바로 우리 자신을 내어 줍니다. 무언가를 주는 실천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어 줍니다. “자신을 내어줌”은 하느님의 성령이신 저 사랑의 힘이 우리의 삶 안에서 뿌리를 내리시도록 하는 것이며 그분의 창조적인 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어 줄 때 우리는 성부 아버지의 형상으로 그분, 생명을 내어주신 그분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우리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형제, 자매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복음화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혁명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혁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깊고 가장 오래 지속되는 우리의 외침입니다.



(바티칸 라디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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