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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8-19 조회수1,061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Am I not free to do
as I wish with my own money?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Mt.20,15)
 
 
제1독서 판관 9,6-15
복음 마태 20,1-16
 

몇 년 전, 순교성지 전담신부로 생활하면서 이 점을 참으로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박해 시대에 살았다면 내가 과연 그 혹독한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있을까?”

그 상황을 겪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더군요. ‘과거 순교자들은 피로서 신앙을 증거했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했는데,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떠한가?’ 라는 질문이 계속 제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참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더구나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편한 생활 속에서 과연 주님께 대한 내 사랑은 어떠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 보니 과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우리들을 보면서 “너희들 참 좋을 때 살고 있다.”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동시에 어렵고 힘든 삶을 주신 주님께 “왜 이렇게 불공평하십니까?”라고 항의도 하실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불공평함을 자주 이야기하지요. 이 세상 안에서의 물질적 분배의 불공평함,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불공평한 구조에 분노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한 잘 풀리는 사람은 계속 잘 되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은 계속 어렵고 힘든 상황의 연속이라며 울부짖습니다.

지금의 삶은 물론이고 역사 안에서도 계속해서 불공평함을 보여주신 주님의 이러한 처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점을 포도밭에서 일한 일꾼들에게 삯을 나눠주는 주인의 비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에 불린 일꾼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나 의롭게 산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는 역사 전체를 뜻하며, 아담의 죄 이후 예수님께서는 그 ‘하루’의 저마다 다른 때 의로운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실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시며 그들을 훌륭한 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모두에게 공정하게 ‘한 데나리온’, 곧 성령의 은총을 공평하게 주심으로써 하느님과 완전하게 하나 되게 하시고 그들의 영혼에 하늘 나라의 인장을 찍으시며 그들을 생명과 불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때를 채우지도 않았는데 하느님 나라에 들게 하시니 하느님의 정의가 잘못되었다고 투덜대는 이들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도록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관대함을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은 편견에 빠져서 스스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속 좁은 우리를 뛰어넘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깨끗이 지워야 합니다. 대신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의 일을 충실히 행할 수 있는 모습, 즉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선하심에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생텍쥐페리).


함께 살아가는 세상

 

아기 공룡 둘리

어렸을 때 ‘아기공룡 둘리’라는 김수정 선생님의 만화를 즐겨 보았습니다. 정말로 둘리가 귀여웠고 왜 어른인 고길동 씨는 이 귀여운 둘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괴롭히는가 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책에서 보니, ‘아기공룡 둘리’를 보면서 “어른으로 나오는 고길동 씨가 불쌍하다 느껴지면 어른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직 아이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서 어렸을 때 보았던 ‘아기공룡 둘리’를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는데 정말로 둘리보다는 고길동씨에게 더 정이 갑니다. 사고뭉치 둘리의 행동들에 당하기만 하는 고길동씨가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정말로 제가 어른이기는 한가 봅니다.

자신의 상황에 따라 보는 관점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른과 아이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소위 세대차라는 것도 자신의 위치와 상황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른이라고 무조건 힘으로 따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또한 아이는 우리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냥 멀리하려고만 할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차이를 서로 인정할 때, 대화가 가능하고 타협점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차이를 없애는 작업들, 어른과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지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의 차이, 그리고 주님과 우리의 간격 역시 우리들이 좁혀야 할 커다란 문제인 것입니다.


아기 공룡 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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