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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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반석 위에 짓는 집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8-22 조회수992 추천수9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연중 제21주일


< 주님께는 영원한 말씀이 있습니다
 >


복음: 요한 6,60-69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다


ROBBIA, Luca della 작, (1446)

  

< 반석 위에 짓는 집 >

 

제가 오산 성당에 부임할 때 몇 년간의 냉담을 풀고 나온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제가 부임할 때 저를 보기 위해 오랜만에 성당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전날 밤 꿈에서 본 모습과 똑같은 신부가 부임한 것을 본 것입니다. 꿈을 꾸었는데 흰 수단을 입고 저와 똑같이 생긴 사제가 부임하였는데, 실제로 나와 보니 그 꿈이 정확히 맞아 이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의심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약간 불안했습니다. 신앙을 갖는 방식이 모래 위에 집은 짓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성적인 체험에 의한 믿음은 생각보다 쉽게 허물어집니다. 예를 들면 모세를 통하여 홍해바다를 마른 땅으로 밟고 건넜던 이들은 삼일도 안 돼서 물이 없다고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우리가 기적을 보면 믿겠다고 말을 하지만 실상 기적은 육체적이고 감성적인 면만 건들기 때문에 심층까지 믿음이 형성되지 못합니다. 조삼모사란 말도 있듯이 감정은 변하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감성적인 체험을 기반으로 한 믿음은 금방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그 부부도 잘 나오나싶더니 다른 신자들에게 상처를 받고는 다시 냉담을 하게 되었고 개신교로 나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열두 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님을 떠나서 많은 수가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는 조금은 씁쓸한 복음말씀을 듣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때만해도 괜찮아보였는데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니 어이가 없어서 다들 떠나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기적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사악한 세대라 하였습니다.

실제로 마귀들도 이런 표징들로 신자들을 미혹할 수 있습니다. 무당들을 예로 들어도 그들도 이미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내고 신통하게 무언가를 알아맞히며 작두를 타는 등의 기이한 것들까지 보여줍니다. 이는 비단 무당들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를 하는 사람은 몸이 3미터까지 떠서 오래 머무를 수도 있고 무공이 뛰어난 사람은 장풍까지도 일으킵니다. 윤회를 믿는 불교의 어떤 아이들은 자신들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없었던 팔이 생기는 이적까지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 믿음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정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열두 사도들이 떠나지 않은 이유를 찾아 그들과 같은 강한 믿음을 얻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도는 왜 떠나지 않을 것일까요? 베드로의 대답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시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이적이나 표징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 않았고, ‘진리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 믿음에 도달한 이들은 어떤 시련이 와도 믿음을 굳건히 지킵니다. 사람은 육체에서 영혼으로, 영혼에서 으로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영까지 믿음이 스며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를 거쳐 영혼을 통과해야만합니다. 육체는 인지하는 오감의 능력을 말하고 영혼은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말하며 영은 그것을 삶으로 드러나게 만드는 실천의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았다면 그 기적을 영혼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여 그것이 영 안에 믿음의 고백인 아멘!”이 터져 나오게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만 보았지 그것을 진리의 말씀으로 소화시키는 작업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역도선수들이 드는 무거운 쇳덩이를 들어 올릴 수 있을까요? 지금은 할 수 없습니다.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냉담률이 많은 이유는 믿음이 말씀으로 견고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이야 성경공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성경 한 자 안 읽으면서 주일미사만으로 신앙을 키우겠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믿어서 성경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먼저 이해하게 되어서 진정한 체험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깊이 숙고한 다음 영에서 우러나오는 아멘!”을 올려드렸습니다. 이렇게 온 존재를 다 해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완전한 믿음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인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가게 된 것은 분명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 듯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학교로 들어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갈등하는 것 자체가 내 자신을 버리지 않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냥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 십자가를 지듯이 참아나가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참아나가는 것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멘! 하며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주님의 도구가 되어드려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가왔던 성경구절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였습니다. 저는 저 스스로 어떤 열매를 드리려 하고 있었지 부르심을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성체조배에 목숨을 걸기로 했습니다. 하루에 정해진 시간 동안은 시험기간이라 해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다만 그분에게 붙어있기만 하면 나에게 성령의 수액이 스며들어와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저절로 맺어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전해주는 일이 곧 사제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성체조배를 하지 않고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한다고 할 정도로 삶과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막연한 부르심이 말씀묵상의 소화 작용을 통해 삶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삶 안에서 뗄 수 없는 증거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적이나 이적, 표징이나 감정적인 것들에 믿음의 바탕을 두는 경우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고, 말씀을 통한 삶의 실천이 되게 하는 것에 바탕을 두는 믿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은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입니다. 끝까지 우리 신앙을 지켜가려면 나의 삶이 말씀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고 삶으로 실천하며 그 안에서 체험할 수 있어야합니다. 만약 말씀이 체험되면 그렇게 변한 삶은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우리도 빵의 기적은 보았으면서 그것을 말씀으로 소화시키지 못한 이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 삶의 모든 것들을 말씀을 통해 이해하고 소화시킬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성경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지 않으면 신앙은 항상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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