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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무화과나무 아래
작성자김영범 쪽지 캡슐 작성일2015-08-24 조회수737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가끔 예수님께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저에게 어떤 요구를 하시는데 마치 베드로 사도에게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니, 마치 거대한 산을 주먹 하나로 격파하라는 말도 안되는, 아니... 지금 당장 명황성에 갔다 오라는 듯한 명령을 하신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불가능이 없다고 하시는데 그럼 지금 당장 명황성에 갔다오라는 명령에 불복종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부정하는 자가 되는 걸까요?

물론 이상한 말을 늘어 놓는다고 생각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 안전 제일 주의와 무사안일하고 순탄한 신앙만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뭔가 부담이 작용하는 것은 확실 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분명 영광과 함께 우리가 고통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예수님의 명령으로 물 위를 걸어야 할 때라면, 이왕이면 중간에 베드로사도처럼 의심을 해서 물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지만, 반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그건 하느님의 뜻이 아니겠지... 하며 처음부터 나의 판단을 우선시 해 버리면 우리는 신앙을 처음부터 가지게 된 이유부터 설명 해 들어가야 옳을 것입니다.

왜 성당에 갔었나요? 단순히 사람들이 가니까 가는 정도였다면 영세를 받을 때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 뭐 하나보다...' 라며 인생을 피상적으로 살기만 한다는 반증이었을 것임니다. 아니면 하느님께서 친히 이 몸을 이끄시고 구원하시는 느낌에 눈물을 흘리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공짜는 없습니다. 우리는 받은 영세로 내가 아닌 (예수님을 모르는)다른 타인을 예수님께로 안내 할 의무가 주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선교의 의무를 주저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좋은 것은 나 혼자 가지고 싶은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좋은 것은 나누면 배가 되는 원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행여나 나의 선교가 다른 이에게 안좋은 위선이나 바보같은 행위로 비추어져 자존심이 상할까 두려워서 입니다. 물론 정당한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는데 바로 선교를 ' 내가 한다' 라는 강박증입니다. 어차피 물위를 걸어오라 명령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물 부력의 원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너의 마음을 너에게 쏟지 말고 너를 만든 나에게 쏟으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엔 기뻐서 마음을 예수님께로 향했지만 자신의 마음이 자기에게서 떠난 것을 발견 한 순간 기쁨이 공포로 둔갑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도 좋은 의미의 전략과 전술이 필요 합니다. 그냥 '예수천국 불신지옥' 8자 외친다고 되는 선교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스가 나타나엘에게 말한 "와서 보라" 라는 4글자에도 엄청나게 많은 의미가 함축 되어 있을 것이지 단순히 벽에다 광고지 붙이듯 단순한 안내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먼저 나타나엘을 보신 것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선교하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손길이 그에게 닿아 있었던 것입니다. "와서보라" 는 우리의 노력은 그저 선교의 일부였지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분은 예수님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교만해서는 절대 안되겠습니다. '내가 한다' 라는 생각 만큼 그리스도 신자에게 커다란 장애물이 또 있을까요? 잘 생각 해 보면 우리도 처음에 가족이나 친구의 손에 이끌려 성당에 나가게 되었을때 심지어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성당에 이끌려 나갔을 때도 그것은 그들이 먼저 나를 이끈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저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기리며 서 있었던 그 무화과나무 아래..... 그곳은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서 있었던 장소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던 바로 그 장소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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