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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생명의 말씀을 모시는 이유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05 조회수1,118 추천수1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연중 제23주일


<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


  
복음: 마르 7,31-37






그리스도


엘 그레코 작, (1606), 톨레도 주교좌 성당


< 생명의 말씀을 모시는 이유 >

 

같은 말이라도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무미건조하거나 혹은 사람을 해치는 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말을 들어도 듣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봅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장님입니다

이런 팻말을 목에 걸고 프랑스 파리의 미라보 다리 위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한 장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곁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그 걸인에게 당신이 이렇게 해서 구걸하는 액수가 하루에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은 침통한 목소리로 겨우 10프랑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행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걸인의 목에 걸려있는 팻말을 뒤집어 놓으며 다른 어떤 말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달 후, 그 행인이 그 곳에 다시 나타났을 때 걸인은 행인의 손을 붙잡고 감격해 하며 물었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선생님께서 다녀가신 뒤 요사이는 50프랑까지 수입이 오르니 대체 어떻게 된 연유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글을 써 놓았기에 이런 놀라운 일이 생기는 겁니까?”

그러자 행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별다른 게 아닙니다. 원래 당신의 팻말에 쓰여 있는 글 저는 때어날 때부터 장님입니다라는 말 대신에 봄이 오건만 저는 그것을 볼 수 없답니다라고 써 놓았을 뿐이죠.”

이는 우리가 쓰는 말 한마디에 따라 얼마든지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준 프랑스의 시인인 로제 카이유의 일화입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은 아닌 것입니다. 옳은 말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겐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겐 한 인생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박지성도 축구를 포기하려고 할 때 히딩크 감독의 격려 한 마디로 유명한 선수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누구나가 생명을 주는 말을 하고 싶지만 모두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아틀랜타 5번가 한 모퉁이에 고무풍선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 고무풍선 장수는 하도 장사가 안 되어 궁리 끝에 파란 색의 풍선을 하늘로 날려 봤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의 관심이 하늘로 날아가는 풍선에 쏠렸습니다. 풍선 장수는 이번엔 노란 풍선을 날렸습니다.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풍선 장수 앞으로 모여왔습니다. 풍선 장수는 이번엔 녹색 풍선을 날렸습니다. 아이들은 재미있어하며 저마다 주머니를 털어 풍선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흑인 아이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저기 있는 검은 풍선들은 날 수 없나요?”

풍선 장수는 흑인 꼬마아이를 유심히 바라본 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검은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냈습니다. 아이는 신기한 듯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검은 풍선을 쳐다보았습니다. 아저씨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아이야, 풍선을 날게 하는 것은 색깔이 아니란다. 그 안에 들어있는 그 무엇이지.”

흑인소년은 크게 감동을 받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결과 세계적인 위대한 흑인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틴루터 킹 목사였다고 합니다.

 

생명의 말씀은 노력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풍선 안에 헬륨이 있으면 풍선이 당연히 하늘로 날 수 있는 것처럼 자신 안에 생명을 간직해야합니다. 그 생명이란 성령님입니다. 그분 없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풍선은 날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오실까요?

 

‘TV 동화 아름다운 세상‘20억년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한 십대 딸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하는 모든 말은 부정적이고 짜증 섞인 말이고 남을 판단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그것이 엄마의 책임인양 반항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밤 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툭하면 사고를 쳐서 엄마의 애간장을 태우는 딸, 엄마의 주름은 늘어만 가고 딸이 빠진 수렁은 깊어만 갔습니다. 어느 날은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왜 그러느냐고 다그쳤지만 아이는 자신의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고 도리어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 딸이 열여덟 살이 되던 생일날이었습니다. 새벽같이 나간 딸은 한밤중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딸아이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엄마는 시간을 되돌려 놓고 싶었습니다.

그날 밤 엄마는 딸아이를 위해 선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 날도 12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온 딸은 책상위에 놓인 선물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상자에는 편지와 함께 작은 돌멩이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이게 뭐야?”

또 뻔한 잔소리려니 하고 심드렁하게 편지를 읽던 딸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이 돌의 나이는 20억 년이란다. 내가 널 포기하려면 아마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겠지...”

딸은 곤히 잠든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20억 년은 너무 길다. 그러니까 엄마... 나 포기하지 마.”

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아이는 비로소 생명을 주는 언어를 되찾았습니다. 사랑이 생명입니다. 생명의 말이 나오려면 생명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습니다. 귀가 들려야 말을 할 수 있듯이 사랑도 들어가는 구멍이 있어야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아야 손으로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의 목소리는 귀로 들어간 사랑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귀머거리이며 말더듬이를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말더듬이는 생명의 말을 건넬 줄 모르는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생명의 말을 건넬 줄 모르는 이유는 그 생명이 깃든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고 다시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댑니다. 그리고 에파타(열려라)’라고 외치십니다. 막혀있는데 무엇이 흘러들어가겠으며 흘러들어가는 것이 없는데 무엇이 입으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손가락이나 침은 모두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엄마의 편지는 비록 글로 되어 있지만 그 안에 사랑이 스며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랑이 스며든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 우리 안에 함께 성령이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사랑이 섞인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들어 우리 안에 간직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말들이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지금 우리가 미사 중에 말씀과 성체로 우리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모시는 모든 이들은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려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들을 살리는 말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입이 열리려면 먼저 귀가 열려야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게으르면 우리는 영원한 말더듬이로 남게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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