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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9.7 월/ 기 프란치스코 신부 - 때와 장소와 틀보다 더 고귀한 생명을 위하여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06 조회수1,685 추천수8 반대(0) 신고



연중 23주 월 루카 6,6-11(15.9.7)


“안식일에 목숨을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The Man With a Withered Hand





  때와 장소와 틀보다 더 고귀한 생명을 위하여

어느 시대든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는 늘 긴장과 대립이 있어왔다. 근본주의는 지나친 엄격성을 불러와 인간을 도외시한 율법주의나 법실증주의를 낳기도 했다. 실제 삶에서도 의미와 존재, 특히 생명보다 시간과 공간, 틀과 규범을 중시하는 모습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런 삶이 과연 행복을 불러올까?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길인데 말이다.

오늘 복음은 ‘또 다른 안식일에’(6,6)라는 말로 시작된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길에 점점 긴장이 고조되어 가고 있고, 적대자들의 반대가 심해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고 계셨다. 마침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6,7)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아차리시고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셨다(6,8). 그분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6,9) 하고 물으셨다.

선을 이루고 목숨을 구하는 일은 시간과 장소나 규정에 매이는 것이 아니며 생명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렇게 율법의 근본정신을 상기시켜주시면서 그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어 고쳐주셨다(6,10).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사람들은 이제 인간 위에 구속하는 틀에서 벗어나 ‘인간을 살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를 체험한다.

하느님의 계명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해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와 생명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신다. 철저히 인간을 위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인간성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선이 모든 이 안에서 되살아나도록 온 존재를 바치실 것이다. 인간의 존엄함을 무시하고 생명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이는 결국 하느님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안티파스로부터 환심을 사고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6,11) 그들은 사람의 생명이나 선(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나 실은 그들의 삶은 이미 살아 있으나 스스로가 만든 영혼의 감옥에 갇힌 수인과 다름없었다.

우리 삶에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선을 이루고 존엄한 생명을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시 하고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목숨 앞에 시간도 장소도, 물질이나 권력도 그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이 길에서 우리는 법이나 제도를 결코 인간 생명이라는 지고의 가치보다 중시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되겠다. 최상의 법은 인간의 구원임을 잊지 않도록 하자.

온갖 생명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 하시며 경탄하신 주 하느님! 생명을 소홀히 여겨 도구화 하고 상품화 하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법이나 제도의 이름으로 서로를 속박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 안에서 생명을 노래하는 저희가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여 저희 안에서 당신 생명의 얼이 꿈틀대는 사랑의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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