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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07 조회수1,477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9월 7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I ask you,
is it lawful to do good on the sabbath
rather than to do evil,
to save life rather than to destroy it?”
(Lk.6.9)
 
 
제1독서 콜로 1,24─2,3
복음 루카 6,6-11
 

예전에 어느 성당으로 강의를 간 적이 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성당 마당에 나와 돌아가시는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을 때였지요.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고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딸의 손을 잡고 제게 오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신부님과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초등학교 6년을 다니면서 두 번이나 같은 반이었다고 하는데 저는 처음 보는 얼굴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나중에 다시 보게 될 때에는 꼭 알아보고 먼저 인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헤어졌지요. ‘두 번이나 같은 반이었다는데 왜 몰라보았을까? 아마도 반에서 잘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친구였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얼른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초등학생 때 너무 예뻐서 남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친구였고, 저 역시 관심이 많았지만 수줍음을 워낙 많이 탔던 시기라서 표현하지 못하고 그냥 마음속으로만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랬던 친구였는데 전혀 알아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시간의 흐름 때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보지 않으니 제 기억 속에 사라졌고 더군다나 30년이 훨씬 넘은 시간은 그 친구의 예쁘장한 예전 얼굴 찾는 것을 힘들게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완벽한 기억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기에 오랫동안 보지 않으면 잊히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계속 기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만나고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멀리하고 그래서 사랑의 주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사랑의 주님을 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사이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안식일 논쟁을 벌이지요.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해석한 율법, 그렇게 하느님을 멀리했기 때문에 율법을 만드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음을 묵상해 봅니다. 나의 입장만을 내세워서 오랫동안 하느님의 뜻을 멀리한다면 바로 옆에 주님이 계셔도 알아볼 수 없으며, 주님을 잊어버려 자신의 입장을 내세울 수 없음에 이상한 마음을 품어 오히려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자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나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인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에 가능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경청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이다(카네기).


지나가다 본 고깃집 광고 구조물. 정말 맛있을까요?

 

신독(愼獨)의 삶을 지향하며

올해 안식년이라 아파트에서 혼자 지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특별히 맡겨진 일이 없다보니 때로는 게을러지는 것 같습니다. 전날 술을 늦게까지 하는 날이면 아주 이른 시간에 새벽 묵상 글을 올려놓은 뒤에 아주 푹 잡니다. ‘안식년이니까 언제 이렇게 게으름을 피워 보겠어.’라는 마음을 간직하면서 말이지요.

언젠가도 이러한 마음을 갖고서 아주 늦게 일어났습니다. 씻고 난 뒤에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나서 인터넷을 살펴보았지요. 그런데 어떤 분이 제 묵상 글에 “신부님, 아주 일찍 일어나셨네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부지런하실 수 있습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댓글을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일어났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안식년이라는 이유로 게으름을 피웠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공자의 대학을 보면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가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혼자 있는 시간에 게을러지고 ‘이 정도는 괜찮아.’라는 안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저를 깨우치는 말입니다.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에 집중하기 보다는, 내 자신에게 당당한 모습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가짜, 위선의 삶을 벗어던지고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도 좋아하시는 삶이 아닐까요?


공원에 놓인 작품. 직접 볼 때는 멋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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