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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12 조회수1,048 추천수1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연중 제24주일


<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


  
복음: 마르 8,27-35





그리스도


엘 그레코 작, (1606), 톨레도 주교좌 성당


<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

 

누구를 안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상은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사람들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한 친구가 복도에서 양치질을 하며 지나가기에 장난을 좀 심하게 쳤더니 양치하는 치약거품이 목으로 넘어갔습니다. 그 친구는 매우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나 잘 알아?”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심한 장난을 치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멍했습니다.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지만 실제로 그 친구에 대해 더 이상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부부사이도 잘 모른다는 말을 듣습니다.

 

2010년 행복전도사로 유명한 방송인 최윤희씨 부부가 모텔에서 동반 자살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최윤희씨는 밥은 굶어도 희망은 굶지 마라”, 그리고 딸들아,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나라”, “당신의 인생을 역전시켜라”, “행복멘토 최윤희의 희망수업등의 책을 써서 절망에 넘어지는 사람을 희망과 사랑으로 이끌어 세웠습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머리를 초록색으로 물들이고 자살이라는 말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돼요. 절망 속에 희망을 찾으세요라며 격려하던 자신이 결국 병마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고 만 것입니다.

아마 최윤희 씨도 행복이란 것을, 희망이란 것을, 인생이란 것을 잘 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온전히 안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무엇 하나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도 인정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보느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나 엘리야나 혹은 예언자 정도로밖에는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견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칭찬해 줄 것이라 믿었던 베드로는 뜻밖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이었습니다. 왜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사도들에게 당신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셨을까요?

이는 당신을 겉으로만 아는 채 안다고 증언하고 다니면 이익보다는 손해가 훨씬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마귀들에게도 그들이 더 이상 당신을 증언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으십니다. 마귀가 그리스도께서 누구인지는 알지만 그건 그 정체만 아는 것이지 실제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뉴스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벌이는 파렴치한 범죄들을 적지 않게 접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전파를 저해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비단 범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도 적지 않게 발생합니다. 어떤 이들은 믿지 않는 이유를 믿는 이들의 행동이 세상 다른 이들의 삶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도 그리스도를 안다고 증언하였지만 결국 결정적인 상황에 가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말합니다. 안다고 믿었지만 결국엔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 그분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인상파 화가인 죠셉 터너(Joseph M. Turner), 거센 폭풍이 일어난 바다를 그린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친구를 자기 화실로 초대했습니다. 터너의 그림을 본 친구는, 감탄을 연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대단하군! 완벽해! 아니, 자네, 이렇게 실감나는 폭풍우 장면을 그릴 수 있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

터너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폭풍이 이는 바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어서, 그는 바람이 거세기로 유명한 네델란드의 한 바닷가로 찾아갔습니다. 거기에서 터너는 고기잡이로 생활하는 한 어부에게 돈을 주면서, 다음에 폭풍이 일기 시작하면, 자신을 태우고 바다로 나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난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 죠셉 터너는 어부에게 자신을 돛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터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나는 성난 파도와 폭풍우를 본 것이 아니라네. 아마 폭풍우를 느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걸세. 거센 폭풍우가 나에게 불어와서 어느새 내가 폭풍의 한 부분으로, 그 안에 서 있다는 느낌을 느꼈단 말일세.”

폭풍을 진정으로 알려고 해도 그 폭풍을 직접 겪어봐야 하는 것처럼 사람을 알려고 한다면 그 사람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어떻게 참으로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신 다음 즉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서서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걱정돼서도 그랬겠지만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충격적인 꾸지람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다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사탄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말라고 한 거야. 나를 안다고 증언하려거든 너도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해.”

진정으로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소금인형이라는 시에서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알기 위해 ...”라는 말이 참으로 맞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알려면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녹아버리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아시기 위해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한 수녀님이 정말 큰 교통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목숨은 부지하였지만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한 달 이상 잠을 못 들게 하는 고통이었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잠도 못 이루는데 보호자로 와 있는 다른 수녀님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수녀님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자신이 예수님께 지금까지 해 왔던 모습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계속 매달려 계시는 고통을 당하고 계셨지만 우리는 그저 우리가 무언가 예수님께 해 드리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 해 왔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베드로도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 자녀의 팔을 하나씩 잘라야 한다고 한다면 지금 짓는 죄는 더 이상 짓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매번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시는 주님의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안다면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아직 그분을 안다고 증언할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수녀님은 예수님의 고통을 느꼈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행복이란 십자가를 질 때 십자가를 지신 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셨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고통을 통한 영적 성장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죽으심으로써 우리 아픔을 아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인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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