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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9.15 화/ 기 프란치스코 신부 - 고통에 함께하는 어머니다운 사랑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14 조회수1,195 추천수5 반대(0) 신고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 화 요한 19,25-27(15.9.15)

 




 


 고통에 함께하는 어머니다운 사랑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고독사(孤獨死)가 늘어나고 있다. 힘들거나 아파도 함께해주는 이가 없고 생각이나 정서를 나눌 사람이 없어 고독의 극한에 내몰려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불특정 다수인을 대상으로 하는 묻지마 범죄도 결국 사회적 안전장치의 결여와 무관심 속에 인간다운 최소한의 삶도 누릴 수 없는 이들의 왜곡된 저항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기쁠 때 함께 웃어주고 슬플 때 함께 울어주는 임마누엘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셨던 성모님의 고통을 회상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아드님의 수난의 여정을 함께 하신 마리아는 시므온의 예언처럼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루카 2,35) 아픔을 겪으셨다.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갈릴래아에서 골고타에 이르는 수난과 죽음의 모든 여정에 동참하셨으며,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로써 함께 드리셨으며 당신께서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다.”(교회헌장 58항)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의 고통을 ‘더불어’ 견디어 내며 그 안에서 부활의 희망과 새 생명을 체험하며 살도록 부름 받았다. 고통과 수난 없는 영광의 부활을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시어 낳으셨을 뿐 아니라 낳으신 아드님의 사랑을 향한 고난의 길을 일생을 바쳐 온전히 함께 하셨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위한 가난한 순례 여정에 함께 ‘늘’ 함께 하셨다. 어디 그뿐인가! 그분은 아드님이 환영받을 때나 적대자들의 반대를 받으실 때는 물론 체포되시어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수난을 받으시고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도 함께 하셨다. 이렇듯 그분은 언제 어디서든 아드님 예수님의 구원 여정에 ‘함께’ 하셨다.

우리는 이웃 사람들의 고통에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조롱하던 로마 병사들, 예수님의 존재를 알아보았으면서도 비겁하게 군중의 손에 예수님을 넘겨버렸던 빌라도, 군중심리와 정치적 술책에 휘말려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쳐대던 군중들, 말없이 슬퍼하며 수난의 여정에 함께 했던 여인들, 달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키레네 사람 시몬. 나는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인가?

오늘의 세계는 세계화와 자본의 거대화, 정보화사회, 첨단 과학의 발달, 융복합화, 다원주의와 다문화 등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인간이 도구화 하고 그 존엄성이 뒷전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겨운 하소연은 구경거리처럼 관망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자신의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비난받고 권력의 걸림돌로 지탄받기도 한다.

이런 현실을 보며 우리 신앙인들을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물어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수난의 여정에 어떤 상황에서나 늘 함께하셨던 성모님의 그 모성적 사랑과 수용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과연 나의 정체성을 무엇인지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정치이념이나 경제적 가치나 성과를 뛰어넘는 근본 가치인 사랑, 그 사랑을 가르치는 복음과 그 핵심적인 구원의 여정을 고통 중에 걸으셨던 성모님의 삶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 모두 이웃과 이 사회의 고통에 대한 관람자가 되지 말자. 사랑의 마음으로 시간을 내어 함께하며 더불어 고통을 호흡하자. 삶에 몸부림치는 이들의 한 맺힌 부르짖음을 내 목소리에 담아 외치자.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 성모님처럼 주님의 영 안에서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이웃의 아픔까지도 바로 내가 함께하며 겪어내야 할 고통임을 잊지 말자. 고독사나 불특정 다수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 노인 자살 등의 사회적 현상에 아파하며 사랑의 책임을 느끼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이제는 일상의 힘든 일과 불편한 관계를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방석 깔고 앉아서 생각으로만, 말로만, 마음으로만 ‘안 됐다!’고 안타까워하는 반쪽 사랑을 넘어서 보았으면 한다. 인간은 모두가 하느님 앞에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이니 ‘너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형식적인 사랑의 제스쳐만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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