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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인은 이미 죽은 사람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19 조회수1,043 추천수1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


복음: 루카 9,23-26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


안젤리코 작, (1450), 프레스코, 169x134 cm, 피렌체 성마르코 박물관


< 그리스도인은 이미 죽은 사람 >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3-4)

 

세례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음과 같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반드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혀서 진정으로 죽은 사람들입니까?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아직은 참된 세례를 받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잡힌 김일곤은 30대 여성을 납치 살해했음에도 잘못한 게 없다고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난 잘못한 게 없어. 난 살아야 해.”

그리고 검거 당시 그의 주머니에는 메모지 두 장이 있었는데 자신을 잡은 형사와 징역형을 내린 판사, 그리고 평소 불친절하다고 느꼈던 의사와 간호사 명단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리고 다 죽였어야 했는데라는 혼잣말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분명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다른 이를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보복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고통과 멸시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이 결국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지 우리는 김일곤을 비롯한 많은 범죄자들의 결말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사는 길은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 자신이 죽은 목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죽일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그 방법도 함께 제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죽은 목숨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분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고통과 멸시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외방선교회에 가면 지하 방에 신부님들의 수많은 유골이 벽에 빼곡히 모셔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사제들을 작은 방에 몰아넣고 한 명씩 나오라고 한 뒤 문 앞에 십자가를 놓고 그것을 밟고 나오면 살려주고 밟지 않으면 바로 목을 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제들은 십자가를 밟지 않고 순교하는 길을 택했고 그 유골들이 그 방에 그대로 놓여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그 죽음만이 부활에 이르는 길이지 다른 길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로 향해 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때문에 고통 받아야 하고 멸시 받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편안함을 결코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그러므로 이제 내가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율법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면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또 이 고을 저 고을 쫓아다니며 박해할 것이다.”(마태 23,33-34)

 

멸망할 인간들은 살아서 박해하는 인간일 것이고 구원받을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고 멸시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결코 살아있는 인간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박해하고 모욕을 주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안산 단원고 강 교감은 처와 12녀를 남기고 야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그에게 사고 책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학생들의 죽음에 대해 인솔 책임자로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죽음으로써 속죄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가 남긴 유서에서 “200명의 생사를 알 수 없는데 혼자 살기에는 힘에 벅차다.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 달라. 내가 수학여행을 추진했다. 내 몸뚱이를 불살라 침몰 지역에 뿌려 달라. 시신을 찾지 못하는 녀석들과 함께 저승에서도 선생을 할까라고 적었습니다. 사실 강 교감은 당시 배 안에서 제자들과 후배 교사들을 구하려고 분주하게 뛰어다녔다고 전합니다. 한 교직원은 말 그대로 도덕군자 같은 사람이었다저혈당 쇼크로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배에 남았을 그였지만 구조된 뒤 죄책감에 너무 힘들어하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어쩌면 그분을 쓰러뜨린 것은 저혈당이라는 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 병이 없었다면 다른 여러 명의 영웅들처럼 끝까지 아이들을 구하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어쩌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이 감사해야 할 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지인에게서 자신이 아는 한 사람이 무덤에서 살아났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집에 시집 온 며느리가 며칠 안 돼 죽어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승에 가서라도 사용하라고 가져온 예물들을 관에 넣어 함께 매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도굴꾼이 무덤을 파고 관을 열라고 하는데 신음소리가 나더랍니다. 놀라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관을 열어보았더니 사람이 살아있더라고 합니다. 그는 몸을 풀어주었고 다시 살아난 며느리는 고맙다며 도굴꾼에게 자신의 폐물들을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곧 부활임을 안다면 우리를 죽게 만드는 이에게 오히려 감사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박해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손자선 토마스 성인은 자신을 거꾸로 매달고 얼굴에 오물을 붓고 입에도 처넣을 때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관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며칠째 세수를 못했는데 당신들이 이렇게 세수를 시켜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피땀을 흘리게 해드린 죄인에게는 잘 된 일이고, 게다가 목이 말랐었는데 당신들이 내 입에 넣어 준 것은 내 죄 때문에 예수께서 마시신 쓸개와 초 대신이 되는 것이니 꽤 잘됐단 말입니다.”

고통과 멸시의 길만이 참으로 영원한 생명에 다다르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죽게 만드는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로마로 압송되어 오면서 자신을 그들에게서 구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자들의 입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길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만 함을 우리 순교자들이 잘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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