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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20 조회수1,218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대축일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save it.
(Lk.9,24)
 
 
제1독서 지혜 3,1-9
제2독서 로마 8,31ㄴ-39
복음 루카 9,23-26
 

인간에게는 평생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어떤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저에게 있어서 기억나는 3번의 기회를 한 번 적어 봅니다.

첫 번째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병원 체험이었습니다. 갑자기 아파서 병원 응급실로 가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병명도 모른 채 열흘 정도 병원에 입원했었습니다. 많이 아팠고, 또한 많이 외로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때 간절히 기도했었지요.

“하느님, 저 낮게만 해주시면 이제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겠습니다.”

두 번째는 신학교 4학년 때에 학생회장이 된 것이었습니다. 남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너무나 힘들어했던 제가 뜻하지 않게 학생회장으로 뽑힌 것입니다.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쓰는 저로써는 원형 탈모증이 생길 정도로 커다란 스트레스의 시간이었지요.

세 번째는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쓰기 시작한 2001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지요. 혼자 공부하면서 자유롭게 살다보니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길이 제게 맞는 길인 것 같고, 그래서 그러한 고민으로 술도 참 많이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신부로서 더 노력하며 살자고 시작한 것이 바로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이었지요.

첫 번째 사건으로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으로 남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지금 여러 곳을 다니며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사건으로 글 쓰는 신부가 되었고, 신부로서 기쁘게 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바로 지금의 저를 만들어 준 3번의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저는 너무나 힘들어서 정말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고, 제발 피하고 싶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 어쩌면 지금 내 자신에게 오는 특별한 기회가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해보니 3번의 기회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현들은 더 많지만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기 힘드니 3번만 이겨도 훌륭한 전환점을 가져올 수 있다고 인간에게는 평생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은 과연 당시의 박해가 참 편했을까요? 정말로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을 테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을 후회하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기회였던 것이지요.

지금은 과거의 그런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계속해서 찾아옵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삶,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노력의 삶이 바로 우리의 결정적인 기회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나를 만들 수 있는 결정적 기회의 요즘이 될 수 있음을 굳게 믿으면 어떨까요?

일이 잘못되면 군자는 제 탓을 하고, 소인은 남을 탓한다(공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많이 들으면서 제 자신의 생활을 바꾸기 위해서 참 오랫동안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처럼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도 갖게 되었고, 독서와 묵상의 생활화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저의 꿈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계하면서 보다 더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야 할 목적의식도 가지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삶이야말로 의미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삶을 전하고 싶은 마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을 수 있음을 우연히 보게 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정말로 이것이 심각한지 아닌지를 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가능하다면 고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더군요. 그런데 여기에 사연을 보낸 자녀가 아버지 때문에 고민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가 바로 바른 생활 사나이, 특별히 자기계발을 위해 아주 열심히 사시는 분인 것입니다. 제3자는 ‘훌륭하다, 대단하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가족들은 이렇게 사는 아버지가 오히려 스트레스이고 고민인 것입니다.

올바른 삶, 성실한 삶, 노력하는 삶, 그러나 이 역시 지나치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스트레스와 고민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이 올바르기 때문에 가족들도 다 나를 이해하고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기에 힘들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옳고 좋은 삶이라도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의 전환은 반드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천년 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삶은 정말로 올바른 삶이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구속하고, 그들의 삶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들기에 위선자라고 하면서 화를 내셨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나만이 올바른 삶이 아닌, 모두가 함께 하는 삶을 찾는 것.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닐까요?



성 정하상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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