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 수 루카 9,1-6(15.9.23)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마라.”(루카 9,3)
The Mission Of The Twelve Apostles
♣ 가난 가운데서 선포되는 복음 ♣
자본주의, 소비사회, 세계화의 병폐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자본의 우상화’요, 그 자본의 막강한 힘에 의한 인간성의 파괴입니다. 교회조차도 중산층화 하고, 사랑을 위한 사목이 아닌 사업에 정신을 쏟음으로써 이런 흐름에 휘말려가고 있다는 우려 섞인 지적들이 있어왔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서 최고의 결과를 얻으려고 애쓰는 성과주의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교회의 핵심적인 사명이 무엇이며 어떻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지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유다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병을 치유하도록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루카 4.40.43; 8,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활동지침은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 어떤 보호 장치도 없는 상태와 무소유의 삶을 강조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9,3) 주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선포하는 이들은 육신을 위해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가슴에 하느님을 품고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세상에 파견할 때 그들을 축복하며, “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1첼라노 29) 하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여행하는 이들에게 있어 지팡이는 강도나 맹수를 만났을 때 대처하기 위해, 신발은 돌이나 가시가 많은 거친 땅을 돌아다니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에서는 지팡이와 신발은 허용했는데 여기서는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적당히 취할 것은 취하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전도여행 중의 거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9,4)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보다 더 좋고 편안한 거처를 찾아 옮겨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삶을 추구하였던 성 프란치스코도 말합니다. “형제들은 집이나 거처, 그 어떤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인준받은 수도규칙 6,1).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는 무릇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철저한 가난의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도인즉 하느님의 사랑과 선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원천이신 그분께 철저히 의탁하고 그분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받아들이지 않거든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고 그곳을 떠나라(9,5)고 하십니다. 그 까닭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이는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성과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며 그들의 자유 또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도 병의 치유도 어디서든 거절당할 수 있으니 거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장소, 물건, 음식 등 모든 것은 늘 하느님을 드러내는 ‘회상의 거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늘나라를 향한 순례 여행을 상기시키며 “우리가 귀양살이를 하는 사람임”(2첼라노 60)을 기억케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 프란치스코처럼 물질, 장소, 사회적 지위, 지식에 대한 애착을 철저히 버려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현세 물질이나 장소, 지식, 사람에 대한 치우친 애정이나 애착 때문에 복음을 품지 못하고 하느님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느님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살아있는 '복음의 회상'이 되지 못함을 되새기는 오늘입니다. 주님, 당신의 불과 같은 사랑으로 저를 차지하시어 언제 어디서나 당신께만 의지하는 가난한 자 되게 이끌어주소서! 그리하여 그 가난과 사랑으로 가난하신 당신을 선포하게 하소서! 아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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