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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24 조회수1,053 추천수4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But Herod said,
“John I beheaded.
Who then is this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kept trying to see him.
(Lk.9,9)
 
 
제1독서 하까이 1,1-8
복음 루카 9,7-9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보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게 되면 어떤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간절히 보고 또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 피곤해, 나 바빠’라면서 보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보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이 멀어지게 됩니다. 보지 않기 때문에 함께 있는 것조차 어색하게 됩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 방송을 보다가 아빠와 딸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힘들어 하더군요. 분명히 서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오랫동안 자기 일에 바빠서 함께 하지 않다보니 서로 바라보는 것을 너무나도 어색해 합니다. 그래서 방송에서는 어떻게든 함께 하게 하고, 서로를 볼 수 있도록 노력하게끔 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이 하면서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혈연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같은 집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랑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진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주님을 보고 있었을까요? 우리 삶 가까이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었을까요? 미사, 기도와 묵상, 성경 읽기, 자선과 희생 등은 주님을 바라보는 좋은 수단입니다. 그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도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기 쉽지 않은데, 약간의 노력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역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보려 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지요. 즉, 자신이 목을 자른 세례자 요한이 다시 되살아났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딸의 춤 값으로 죽였다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단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 나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보려함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의 죄책감에서 나오는 보려는 마음이 아닌,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보려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주님을 보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서만이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뵐 수 있으며, 이 주님을 향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마음을 자극하는 단 하나의 사랑의 명약, 그것은 진심에서 오는 배려다(메난드로스).


어제 저녁 동창신부가 찾아와 맛있는 것을 사줬습니다.

 

잡초의 소중한 존재

한 농부가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밭에서 잡초를 뽑아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신은 왜 이런 쓸모없는 잡초를 만든 것일까? 이 잡초들만 없으면 오늘 이렇게 더운 날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고 밭도 깨끗할 텐데......”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동네 노인 한 분이 그 말을 듣고는 농부를 타일렀습니다.

“여보게, 그 잡초도 무언가 책임을 띠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네. 잡초는 비가 많이 내릴 때는 흙이 내려가지 않도록 막아주고 너무 건조한 날에는 먼지나 바람에 의한 피해를 막아주고 있네. 또한 진흙땅에 튼튼한 뿌리를 뻗어 흙을 갈아주기도 하지 만일 그 잡초들이 없었다면 자네가 땅을 고르려 해도 흙먼지만 일어나고 비에 흙이 씻겨내려 이 땅은 아무 쓸모가 없이 되었을 거야. 자네가 귀찮게 여긴 그 잡초가 자네의 밭을 지켜준 일등 공신이라네.”

생각해보니 세상에는 아무데도 쓸모없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서로 다른 쓰임새와 의미로 이 세상을 빛내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 쉽게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너무나 부족하고 쓸모없어.’

이렇게 자존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부족하고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인 것입니다. 내 자신을 더욱 더 귀하게 생각하고 스스로를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분명히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걸맞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제 저녁 갑자기 저를 찾아준 동창신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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