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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불안한 폭력을 부르는 불평등 / 복음의 기쁨 59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27 조회수594 추천수0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타니아 근처에서 승천하실 때에

‘흰 옷을 입은 이’가 제자들에게 다가가 분명히 일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예수님은 이렇게 분명히 오실 게다.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셔서 당신의 그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으로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우리 모두를 좌우로 가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역사의 종착지(end of history)’까지는 불의한 사회 구조 안에 굳어져,

악으로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희망의 바탕이 될 수 없단다.

역사의 종착지의 의미는 예수님 재림일 게다.

다시 오신 그분께서는 ‘작은 이’ 베푼 이와 그러지 못한 이를 구분하여 준엄한 심판을 할 것이다.

수 없이 깔린 작은이로 변장한 예수님을

찾으라는 계명을 지킨 이와 배척으로 그들을 내몬 이의 구분을 하겠단다.

 

폭력을 낳는 불평등은 안 된다.

오늘날 많은 곳에서 보다 더 큰 안전을 요구하지만 실상은 그러질 못한다.

다양한 사회 안에서 각 계층 간의 불평등과 배척이 없어지지 않으면,

폭력을 뿌리째 뽑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게다.

가난한 이들과 못사는 민족이 폭력을 유발내지는 휘두른다고 비난을 받지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이를 결단코 막을 수 없으리라.

이처럼 도처에서 시도 때도 없이 온갖 형태의 전쟁과 폭력이 계속되면서 불안감이 조성된다.

그리고 그 양상은 날로 증가가 된다.

 

국제, 또는 같은 민족 간에도 사회의 각 계층에서 일부 구성원을 소외시키려하면,

어떠한 정책이나 공권력도, 사법부의 감시 제도도 평온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다.

이는 단순히 불평등이 제도권에서 제외된 ‘작은 이’들의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일으킨 게 아닌,

사회경제 제도가 그 뿌리부터 확실히 불의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게다.

 

우리가 추구하는 선이 확산되려는 것과 같이 악에 편승하는 것,

다시 말해 선에 반하는 불의도 그 해로운 힘을 널리 퍼뜨려

탄탄해 보이는 온갖 제도를 은연중에 파괴하려 든다.

이렇게 우리가 추구하는 여러 행동에는 필히 그에 부합된 결과가 따른다고 할 때,

한 사회 구조 안에 밴 악은 언제나 ‘분열과 죽음의 잠재력’을 지닌다.

 

이것은 불의한 사회 구조 안에 굳어져 버린 악으로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희망을 이룰 수가 없다.

사실 구조적으로 법으로 풀어야 할 게 수두룩하다.

그건 근본적으로 사람 사는 곳에는 유형무형의 죄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역사의 종착지인 당신 재림 시에 필히 ‘최후의 심판’을 하시겠단다.

우리는 지금 평화로운 발전의 조건들이 덜 마련되어,

불평등에 기인된 폭력이 난무하는 불안한 시대에 산다.    http://blog.daum.net/big-l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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