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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5-09-30 조회수79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5년10월4/주일복음말씀묵상/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10,2-16)

 

 

마르10,2절에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물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신명24,1-4절과 모순되는 답을 내려 스스로 자기를 옭아매기를 내심 바랐다. 모든 바리사이들은 이 구약성경 구절이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고, 남편들만 그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이혼은 재혼할 권리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혼의 근거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이 당시에는 헤롯 왕의 이혼을 계기로 해서 그에 대한 논쟁이 많았던 것 같다. 바리사이들 중 보수파인 샴마이파는 아내가 간음을 범했을 때에만 이혼을 허락했지만, 그러나 자유파인 힐렐파는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서 이혼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어느 파의 의견을 따를 것인지를 시험하여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 예수님은 헤롯왕의 관할인 베뢰아에 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처럼 헤롯 안티파스를 화나게 하여 체포될 수도 있었다. 헤롯왕은 레위기 18장의 규례에도 불구하고 이종 조카인 헤로디아와 결혼했었다.

 

3-4절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어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가 허락하였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의 역질문은 바리사이들의 해석을 제쳐두고 그들로 하여금 구약성경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명령하다라는 동사는 예수님께서 이혼문제에 관한 모세 율법에 대하여 질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리사이들은 이혼 규례의 근거로 신명기24,1-4절을 요약하여 말하였다. 곧 모세가 증인들 앞에서 이혼증서를 써서 아내에게 주라고 한 것은 죄없이 버림받은 여자들이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자유를 주기 위함이며, 법적절차를 밟게 함으로써 이혼을 쉽게 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혼증서를 주게 한 원래의 동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간음죄는 그 죄가 분명히 성립될 때는(민수5,11-31),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이 가해졌다(레위20,10; 신명22,22-25). 예수님 당시까지는(대략 AD 30) 사형이 있었다(마태1,19-20). 그러나 랍비들의 법은 간음한 아내와 이혼하도록 했다.

 

5절은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라고 말한다. 곧 모세의 율법은 인간성의 완악함을 염두에 두고 차선의 방법으로 합당한 이혼을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본래 의도는 아니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신 것이다(마태5,17-18, 21-28).

 

6-8절에서 예수님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창세기 1,27절과 2,24절을 인용하시면서 창조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이 문제를 해석하신다. 예수님은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문제의 핵심과 기본원리를 지적하신다. 예수님은 부부가 전인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결혼은 쉽게 깨질 수 있는 일시적인 편의의 계약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행한, 일생동안 연합하여 살겠다는 상호 신실성의 계약이다(잠언 2,16-17).

 

9절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금지조항 하나를 덧붙이셨다. 그러므로 6-8절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께서 한 육체로 결합시켜 준 것을 인간이 나눌 수 없다(현재 시제). 여기서 사람은(안드로포스, 곧 남편을 의미한다) 이혼을 통해 결혼을 깨뜨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결혼은 일부일처제적, 양성적인, 영원한 한 육체관계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느슨한 생각과 반대로 세례자 요한의 용감한 선포를 확증하신 것이다(마르6,18).

 

10-12절은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이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부부의 결합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이 다시 강조되고 있다. 비록 이혼증서를 써 주어 이혼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효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마르코복음에만 나타나는 가중되고 독특한 구절이다.

 

이혼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신약시대에 유대법에 요구된 성적 부도덕성에 대해서는 이혼 가능성을 열어 놓으셨다(10,4). 그러나 랍비들의 법에는 허락되었지만, 재혼은 여기서 예수님에 의해 금지되었다.

하느님은 남편과 아내가 영구히 함께 살도록 뜻하셨다. 이혼은 부정한 결혼생활에서 비롯된 빗나간 예외였다(마태5,32). “깨어진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소원은 용서와 화해이다(1코린7,10-11, 호세1-3). 누구든지 도래하는 하느님의 통치에 대해 회개와 믿음으로 마음을 연 사람은(1,15) 또한 이 뜻에도 마음을 열 것이다! 알렐루야!

 

13절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도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쓰다듬어주시도록 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고 있었다. 여기서 쓰다듬는행위는 미래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보이는 수단(10,16)이며, 어린아이들(파이디아)은 갓난아이에서부터 10대 이전까지의 어린이들을 말한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왜 꾸짖었을까? 제자들은 아마도 어린아이들이 통제가 잘 되지 않는 귀찮은 존재이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위험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치원을 오랫동안 운영해온 어떤 지인이 한 말이 기억난다.‘유치원생들이 너무 순수하고 귀엽다고요? 아닙니다. 이미 나무나 영악합니다. 어린아이들을 오랫동안 대하다보면 그 부모의 성품을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부모와 거의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무섭습니다.’또 오래 전 일이지만, 어느 수도회가 운영하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성령세미나에 수년간 참석했을 때의 경험들이다. 부모들을 따라와서 처음부터 내내 뒤편에서 떠들며마구잡이로 통제 불가능했던 어린아이들과 이 아이들에 대한 꾸중이나 미안함과 같은 이웃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전혀 없는 이 땅의 믿는 어머니들을 보면서 애통해 하였다.

 

곧 감추인 죄성을 교묘하게 표출하는 무서운 어린아이들과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교양 없고 무식하며 이기적인 일부 어머니들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때 나는 내 아내에게 당신은 절대로 이러지 마!’라고 충고하곤 하였다. 나의 이러한 슬픈 기억과 경험이, 성경의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착잡하고 단순하게만 받아들일 수 없어 늘 복잡하였다.

 

14절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시고언짢아하셨다. 원문상 언짢다노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강한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이 단어는 마르코복음만의 독특한 용어이다(41).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성령께서는 어린아이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와 말씀에 대한 빛을 나에게 허락하셨다! 어린아이의 장점은 그들은 온전히 선물을 받아들이는 자라는 점이며, 그들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하면 어린아이들은 불완전하므로 모든 부분에서 부모로부터 전적으로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고, 이를 아무런 저항 없이 주는 대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모의 공급은 대가없는 선물이며, 아이들은 당연하게 그 선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받기 위해 벌린 어린아이의 빈손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환영하셨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 곧 믿는 이들의 삶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통치(1,14-15)가 이러한 자들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곧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선물을 받고자 빈손으로 예수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나 예수님께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15절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엄숙한 선언으로 예수님께서는 위의 14절의 진리를 발전시켰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있는 태도로 하느님의 나라를 현재의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곧 그는 미래의 축복, 특히 영생에서 제외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업적이나 공덕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다른 방법으로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에 의한 단순한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다(1,15).

 

16절은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의 장점은 그들의 무죄성이나 순종이나 순수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의 장점은 그들이 온전히 모든 것을 선물로 받는 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있다! 믿음이란 받기 위해 벌린 어린아이의 빈손과 같은 것!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인격에서 현재하기 때문에 이제 어린아이와 같이 그의 팔에 안겨서 축복을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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