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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10-04 조회수777 추천수5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10월 3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I give you praise,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Lk.10,21)
 
 
제1독서 바룩 4,5-12.27-29
복음 루카 10,17-24
 

선배 신부님께서 제게 “밥은 잘 해 먹고 사니?”라고 묻습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하지요.

“제가 얼마나 밥을 잘 하는데요? 저 잘 먹고 삽니다.”

그런데 어제 전기밥솥에 밥을 하려다 말고 문득 누룽지가 있는 밥을 하고 싶었습니다. 전기밥솥으로는 누룽지가 도대체 생기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냄비에다가 쌀을 넣고 물을 부어 밥을 해 보았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누룽지가 생기기는 했지만 밥이 설익은 것입니다. 밥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맛난 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전기밥솥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종종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잘 나서, 나의 능력이 뛰어나서 일을 잘 할 수 있던 것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나 하나만으로는 불가능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데도, 무조건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나 때문에 잘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어느 성당에 강의를 다녀왔는데 제 생각에도 반응이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의 끝나고 돌아가시는 분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성당 입구에 서 있는데 거의 모든 분들이 강의 잘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문득 들은 생각은 ‘이렇게 강의를 들어주시는 분들이 없다면 과연 강의를 할 수가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내가 사제가 아니라면 이렇게 성당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강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제가 잘 나서가 아니라, 이런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해주신 주님이 계시고 부족한 강의를 들어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 보니 저절로 감사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제 멋에 취해있었던 적이 있었던 모습을 떠올리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주님 앞에 전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기쁨에 차서 자신들이 했던 일들을 자랑스럽게 보고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으쓱했나 봅니다. 하긴 부족한 자신들의 힘으로 힘센 마귀를 주님의 이름으로 쫓아내는 경험을 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요?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기뻐하지 말고,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시지요. 자신의 업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했다는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도 이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하늘에 나의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는 일을 더욱 더 즐겨야 한다는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세상에 무엇인가를 남겼다는 기쁨보다는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 역시 주님께서 바치셨던 감사의 기도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게 될 것입니다.

행복이란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삶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바로 이때 필요한 한 가지는 물론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진다(토마스 머튼).


어제는 외식했습니다. 메뉴는 칼국수.

 

실연당한 여인

실연당한 여인이 길에서 울고 있었다. 한 철학자가 이유를 알고 위로하는 대신 웃으며 말했다

“너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잃은 것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잃은 것이다. 그런데 너는 왜 괴로워하는가? 지금 가장 괴로운 사람은 누구겠는가?”

여인이 울음을 그치고 미소 짓자 철학자가 말했다.

“그래도 가장 괴로운 건 너^^ ”

그렇지요. 사랑의 아픔은 그 누구도 대신하기 힘듭니다. 세상의 그 어떤 아픔보다도 클 것입니다. 하지만 위 철학자의 말처럼, 생각의 전환을 통해 조금이나마 줄일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 상대방은 사랑해주는 사람 하나를 잃었고, 나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 하나를 잃었다는 생각.

생각의 전환을 통해 삶을 보다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 바꾸기가 참 쉽지는 않네요.


어제 강의갔던 성당 제의실에 계신 성모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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