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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희는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제자로 삼으라!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5-10-19 조회수1,05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51018/주일복음말씀묵상/ 너희는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제자로 삼으라!

(마태28,16-20)

 

 

<어찌할꼬!

나에게 미사의 은총이 사라져 버렸다! 주님!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신부는 말씀 전례 제1독서 후 화답송과 제2독서 후 복음 환호송 알렐루야!를 감사와 찬미로 크게 찬송 부르지 않고, 너무 작은 소리로 장송곡처럼 부른다며 엄하게 신자들을 나무란다.……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자세히 관찰해보라!

1독서(이사야서의 말씀), 2독서(로마서의 말씀), 화답송(시편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 의미도 전혀 모르면서, 오늘 독서자로 선택된 한복까지 곱게 차려입은 형제자매가 혹 실수할까봐 조심조심하면서 소리로말씀을 읽고 거룩을 흉내 내는 독서가 우리에게 무슨 영적인 양식이 되는지? 정말 교회의 이것을 알고 싶다!

 

신부가 강론에서 말씀의 지혜로운 해석은 한마디도 없이, 외국어처럼 아리송한 그 소리로 읽기 급급한 말씀으로, 우리가 어떻게 감동을 받고 감사와 찬미가 터져 나올 수 있을까?

오늘날 말씀을 영으로 전달하는 강론대의 사역자가 사라졌으므로, 당연히 성령의 역사는 없고 죽은 미사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일 터!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먼저고, 그 다음은 자연적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 빵은 내 몸이다.”(마태26,26)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한1,14)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찬 전례가 의식이라면, 그 참된 내용은 몸인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는 성찬 전례는 시쳇말로 앙꼬없는 찐빵이다. 만일 성찬 전례와 성체의 분배가 신부들만의 독점권이라면(?), 먼저 말씀의 실력부터 갖추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상이 될 수 있다!

 

2. 수시로 있는 일이지만 오늘도 심했다! 복음 말씀의 선포와 신부의 강론시간을 서울에서 내려온 주교회의 소속 어떤 형제의 개인적인 잡담그리고 경향잡지라는 잡지의 구독 선전으로 대신한 것이다! 신성한 미사 예배를 위하여 이러한 광고는 당연히 광고시간에 해야 하며, 먼저 신자들의 양해부터 구해야 할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신자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하느님 말씀의 지식도 부족하고, 이 시대 갈등과 분열되고 있는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조금의 고민도 없이, 평신도 위에 군림하면서 오만과 허세와 태만으로 굳어버린 성직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처럼 순한 우리 평신도들이 참 불쌍하다!

 

3. 오래 전 경험한 충격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미사 강론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당신은 골프나 치려고 미국에 온 신부냐? 라고 미사 시간에 어떤 형제가 벌떡 일어나 나무라던 충격적인 장면이다!(그 때 이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꾀나 이름이 알려진 인기 있는 신부였다). 그리고 몇 일 후, 교포신문에 대문짝만한 기사로 이 장면이 실린 것을 보고 듣고 경악한 일이 생각난 것이다!

 

그때는 그 형제를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우리도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한심한 생각까지 든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미사 시간에 내가 살기 위하여 이상한 버릇이 작동하기 시작하였고, 오늘 복음 말씀이 무슨 뜻인지 혼자서 골똘히 묵상하기 시작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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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28,16절은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라고 말한다. 이방적인 갈릴래아는 복음의 출산지이다. 복음은 이곳으로부터 또한 비유대적인 세계로 퍼져나가야 한다. 여기서 은 마태오복음에서 특히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 장소이며 하느님의 계시의 장소이다!

 

하늘나라의 헌법인 산상설교(마태5-7)가 산에서 선포되었고(마태5,1), 하늘의 왕은 높은 산에서 변형되셨으며(17,1), 이 시대에 관한 예언도 산에서 말씀하셨다(24,3). 또한 예수님에게 마귀의 세 번째 시험,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마지막 유혹의 높은 산과 대칭을 이루는 것 같다. 이제 하느님의 계획을 위해 제자들은 또 다시 산으로 가야 했다. 우리는 오직 이 땅과 분별된 높은 산에서만 신약의 경륜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17절은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입증하셨으므로, 그들이 그의 부활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들 중 몇몇이 그들 앞에 나타나신 위엄과 권위와 광채를 띄고 있는 이가 정말로 예수신지 물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심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말씀하시자 신속히 사라져 버렸다.

 

18절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고 말한다. 가톨릭성경에서 번역한 권한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exousia, 임금의 공적인 권리 또는 권세를 뜻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권리를 표현하는 권한보다는 권세가 오히려 적합하다! 이 권세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부여하신 것으로, 이제 그는 그 권세에 근거하여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하셨다.

 

19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고 민족들을 제자 삼으라고 명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복음 전파는 단순히 죄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모든 민족들을 제자 삼는 것은 이 땅 위에서 그분의 나라, 곧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이방인들을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고,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다시 제자의 역할을 수행케 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한다는 적극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민족들을 제자삼기 위해서 주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았다.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 곧 왕국의 문제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세례란 회개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옛 생명을 끝내고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시작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옛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사역은 다만 물로 주는 예비적인 세례로 시작되었다. 이제 하늘의 왕께서는 이 땅에서 그분의 사역을 성취하고,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과하고 생명주는 영이 되신 후(1코린15,45), 그분의 제자들에게 제자 된 사람들을 삼위일체 하느님 안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다.

 

이 세례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한 방면은 물에 의한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한 방면은 성령에 의한 보이지 않는 것이다(사도2,38, 41; 10,44-48).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방면의 표현이자 증거인 한편, 보이지 않는 방면은 보이는 방면의 실제이다. 그 영의 보이지 않는 방면이 없다면 물에 의한 보이는 방면은 헛된 것이다!

또한 물에 의한 보이는 방면이 없다면 그 영에 의한 보이지 않는 방면은 추상적이고 비실제적이다. 양면이 모두 필요하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세례를 명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은 오순절 날(사도1,5; 2,4)과 코르넬리우스(고넬료)의 집(사도11,15-17)에서 그들과 온 교회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었다(1코린12,13). 그 후 이것을 근거로 하여 제자들은 새로 믿게 된 사람들을(사도2,38) 보이는 물속으로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로마6,3-4), 그리스도 자신 안으로(칼라3,27), 삼위일체 하느님 안으로(마태28,19),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1코린12,13) 세례를 주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분의 장사를 상징하는 물은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옛 역사를 종결짓는 무덤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고, 그리스도는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체현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은 결국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이기 때문에 새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그리스도 자신 안으로, 삼위일체 하느님 안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모두 똑같은 한 가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방면에서는 그들의 옛 생명을 끝내는 것이고, 적극적인 방면에서는 그들을 새 생명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주님이 정하신 세례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옛 생명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19절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에서 이름으로는 그리스어 원문에 의하면, “이름 안으로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안으로라는 단어는 로마서6,3, 칼라3,27, 1코린12,13절에서와 같이 연합(union)을 뜻한다! 이와 동일한 그리스어 단어가 사도8,16, 사도19,3, 5, 1코린1,13-15절에서 사용되었다.

 

사람들을 삼위일체 하느님 안으로 세례 주는 것은 그들을 그 분과의 영적이고 비밀한 연합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위해서는 하나의 이름이 있을 뿐이다. 그 이름은 거룩한 존재의 총체이며 그분의 인격과 동등하다. 어떤 사람을 삼위일체의 이름 안으로 세례 주는 것은 그 사람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든 어떠하심 안으로 잠기게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서 사람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세례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세례 주는 것으로 계시된다(사도8,16; 19,5). 그들을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인격 안으로 세례 주는 것이다(칼라3,27; 로마6,3).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체현이요, 생명주는 영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이 그분 안으로 세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실제 안으로 들어가는 이러한 세례는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하늘에 속한 나라는 땅에 속한 사회와 같이 혈과 육을 가진 사람들로 성립될 수 없다(1코린15,50). 그것은 오직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연합 안으로 잠긴 사람들과 그들 안으로 역사된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터가 굳어지고 건축된 사람들로만 구성이 가능하다.

 

20절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한다. 하늘에 속한 왕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는 하느님이시다(1,23). 여기서 그분은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곧 이 시대 끝까지 항상 모든 권세를 가지고 부활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

 

마태오복음과 요한복음은 주님의 승천에 관한 언급이 없는데, 이것은 그분이 생명으로(요한14,16), 임마누엘(마태1,23) 하느님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그리스어의 현재형을 사용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현재적으로 계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닌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오늘 주님의 이 마지막 명령은 사도들이 순교하면서, 모든 곳에 가서 그들의 메시야이며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수행되었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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