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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10-20 조회수1,143 추천수6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Blessed are those servants
whom the master finds vigilant on his arrival.
(Lk.12,37)
 
 
제1독서 로마 5,12.15ㄴ.17-19.20ㄴ-21
루카 12,35-38
 

전에 청년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의 결혼 이상향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얼굴, 키, 몸매, 직업 등은 상관없습니다. 그저 저를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다른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얼굴, 키, 몸매, 직업 등은 상관없습니다. 그저 제가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둘의 말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명은 자신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을, 다른 한 명은 자신이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말하지요. 솔직히 자신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쉬울까요? 그 순간에는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결혼해서 살다보면 나를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고 하지요. 반면에 자신이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자신의 노력을 계속해서 하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 그만큼 상대방의 부족함까지도 받아들이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지요.

이는 부부관계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늘 상대방이 나를 잘 이해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해해 주지 못함에 대해 얼마나 억울해하고 또 화를 낼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내가 먼저 이해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안 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해 주기만을 바라는 것보다는 훨씬 더 수월할 것입니다.

이해받으려는 삶, 이해하려는 삶. 과연 여러분은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이해하려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대상은 전혀 바라보지도 또 생각하지도 않으면서도 “난 너 이해해.”라고 말만 한다면 어떨까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의 모습이고, 결국 더욱 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조건 주님께서 부족한 나를 이해해 주시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주님의 편에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런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님께서는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며, 또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게 됨으로 인해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깨어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이해받기만을 바라는 모습에서 벗어나, 주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한 이 세상 누구도 당신을 열등하다고 느끼게 할 수 없다(엘리너 루스벨트).


불을 켜고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실수를 아끼지 마라

얼마 전 텔레비전의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뜻밖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바보(바라볼수록 보배인 것 같은 사람이라고는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만 순수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나라의 수도 맞추기, 사칙연산, 맞춤법, 쉬운 영어 단어 쓰기, 사자성어 맞추기 등의 문제를 내서 풀도록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자신의 무식함을 자신 있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 출연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가 잘 하는 것 하나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내가 잘 하는 것을 그들이 못한다고 해서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도를 못 맞췄다고, 사자성어가 틀렸다고, 엉뚱한 답변을 했다고 부끄러워해서 소극적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에도 그저 당당합니다. ‘자신이 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최고’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 제가 저 프로그램에 나가서 문제를 맞혀야 하는 상황이 돌아온다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몇 개는 틀렸습니다. 그런데 그 틀린 사실에 대해서 무척이나 부끄럽고 창피해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제일 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실수를 아끼지 마라. 하나도 틀리지 않는 사람들보다 각광받는 사람은 자신감 있게 틀리는 사람이다. 실수를 피하지 마라.”

내가 자신 있어 하는 것들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틀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니까 틀리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틀렸으니까 다음에는 맞힐 수 있을 거야.”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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