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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5-10-26 조회수72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51025/주일복음말씀묵상/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마르10,46-52)

 

 

마르10,46절은 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라고 말한다.

예리코는 저주받은 곳이지만 주님이 가셨을 때는 축복을 받기 시작하였다. 성경의 말씀의 배열은 의미심장하다. 바로 앞 구절인 마르10,35-45절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라고 청한 바로 직후의 장면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세 번째 예고(마르10,32-34)를 하시고, 지금 몸소 죄에 빠진 인간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마시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다(시편75,8; 예례25,15-16). 그리고 인간이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마땅한 고난의 강물 속으로 빠지려고 하신다(18,5-6; 42,7; 69,20). 곧 예전에 요단강에서 행하신 세례가 그분을 위하여 완성되려 하고 있는 바로 직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두 제자들은 가장 좋은 자리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여전히 옛 삶과 그 목표에 완전히 사로잡혀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완악한 몰이해에 관한 말씀과 티매오의 아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의 등장의 의미는 모든 제자들이 소경이었음을 가리킨다!

지위에 대한 그들의 야망은 그들이 눈멀었다는 표시이다. 그들의 야망은 그들이 여전히 저주 아래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중에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주기를 요구하고 나머지 제자들이 서로 불평한 직후에, 그들 모두가 예리코, 곧 저주의 도시에 왔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이다.

 

10,47절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틀림없이 예수께서 시력을 회복하여 주신다는 것을 소문에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간절한 마음과 믿음으로 소경이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크게 소리내어 외쳤을 것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소경이 한 사람인데, 마태오복음에만 소경 둘로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태오복음은 주님이 다윗의 자손(왕이신 분)이심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둘이라는 숫자는 증거의 수이다. 이 두 소경의 증언이란 하느님의 뜻, 곧 비록 주님이 모두에게 거절당했지만 그분이 여전히 왕이심을 말한다.

 

예리코에서의 이 사건은 11장에서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위한 전주곡이었다! 곧 이 사건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이사35,5)라는 예언의 성취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을 예루살렘 입성(11,1-11)의 서론으로 배치함으로써 마르코복음 전체의 배열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48절은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주님의 의도는 그로 하여금 더 크게 소리치게 하는 것이었다. 꾸짖는 것은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군중들은 이 소경이 주님을 증언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주님께서는 더 크게 외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으셨으니, 그것은 그분이 그 칭호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2사무7,8-16절에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왕에 대한 공식 칭호가 되었다. 바르티매오가 이 칭호를 사용한 것은 그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눈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유대인들의 눈먼 불신과는 대조적으로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야였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9-50절은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여기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겉옷이란 지위를 상징한다. 경찰관이나 의사가 입고 있는 겉옷은 바로 지위를 가리킨다. 바르티매오는 아무런 지위도 주의하지 않았다. 오직 유일한 그의 갈망은 시력을 갖는 것이었다.

 

51절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마르10,35-52절까지를 주의 깊게 묵상한다면, 우리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와 하나였다는 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37, 51)라는 똑같은 질문을 야고보와 요한에게, 또한 바르티매오에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질문에 대한 그들의 요청은 중대한 차이가 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잘못된 방법으로 구했으나, 바르티매오는 바른 방법으로 구했다는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구했으나, 바르티매오는 보게 해달라고 구한 것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바르티매오의 눈멂이 치료된 것은 또한 야고보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의 눈멂이 치료된 것이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분 좌우편에 있는 지위를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확실히 그분은 그들의 눈멂을 치료하셨다. 그분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 되시기 위해 오셨음으로 소경에게 시력을 되찾아 주시기 원하셨다.

 

52절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바르티매오의 육체의 구원, 곧 어둠에서 빛으로의 인도는 그의 영적 구원에 대한 표징이었다(시편91,14-16; 루카3,4-6).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눈을 치료받은 다음 즉시 관광을 하면서 세상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축복을 받은 후에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소경은 그분을 따랐다! 바르티매오의 자세는 제자직을 분명히 그려주었다. 바르티매오는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였고, 예수에 대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자기에게 주시는 사람으로 신뢰하였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볼 수 있었을 때, 그는 예수님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알렐루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목적을 물으신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목적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는 이유이다! 위기와 고난의 시기에 한 우리의 기도가 자주 응답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여기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의 목적이 제시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분의 속죄 사업, 곧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 사업에 개입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길이고 과제이며 목적을 가진 기도이다! 그런 후에 누가 주님의 오른편이나 왼편에 앉게 될는지는 하느님께서 홀로 결정하실 일이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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