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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영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의 계획의 핵심이다!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5-10-29 조회수1,158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느님의 계획은 무엇일까?/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영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의 계획의 핵심이다!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에페4,6),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2코린13,5),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안다(로마8,11).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세 위격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 속 어디에 계시는가? 사람 속 어느 부분에 계시는가?

오늘날 그리스도는 우리 영 안에 계신다!

 

2티모4,22절은 주님께서 그대의 영과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우리 영 안에 계시려면 먼저 그분께서 영이 되셔야 하고, 다음으로 우리에게 영이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이 두 영이 한 영으로 연합되어야 한다. 만일 주님께서 영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우리 영 안에 계실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가 그분과 한 영이 될 수 있겠는가?

 

사람의 영의 위치를 알려면 영과 혼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히브4,12절은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존재를 찌르며 영과 혼을 분리하는 예리한 칼이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성전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곧 바깥마당, 성소, 지성소이다. 하느님의 임재는 지성소에 있었다. 바깥마당에는 십자가의 예표인 제단이 있었고, 제단 바로 뒤에는 성령의 일을 예표하는 물두멍이 있었다. 성소에는 진설대와 등대와 분향단이 있었다. 그러나 지성소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그곳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지성소에 계셨고 하느님의 임재와 하느님의 영광의 나타남도 역시 지성소에 있었다.

 

성경은 또한 우리가 성전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1코린3,16). 우리는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1테살5,23).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의 어느 부분에 계시는가? 2티모4,22절에 따르면, 주님은 분명히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 우리의 영이 바로 지성소이다! 구약 성전의 예표는 이에 대한 매우 분명한 그림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임재는 지성소에 있다. 곧 우리 영 안에 성령이 계신다!

 

하느님의 성전의 이 예표는 오늘날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 우리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우리의 몸은 바깥마당과 일치하고, 우리의 혼은 성소와 일치하며, 우리 사람의 영은 지성소와 일치하는데, 이 영이 바로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다.

히브10,19절에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원문 참조).

 

우리가 이 땅에 거하는 동안 오늘 우리가 들어갈 지성소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사람의 영이 하느님의 거처, 곧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내실인 바로 그 지성소이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 하늘로 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은 이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은 우리가 하느님을 접촉할 수 있는 지성소다. 따라서 우리의 영을 분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지성소를 찾을 수 없다!

 

우리 주님은 성육신과 인간 생활과 이 땅에서의 고난 등 모든 것을 이루시고 죽고 부활하시고 보좌에 앉으셨다. 놀라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이제 이 모든 실재는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 안에 있다. 내가 이 주제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성령께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셨으며, 이제 이 사람의 영이 하느님의 거처라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하느님을 영접하고 하느님을 담은 기관이다. 만일 우리가 이 놀라운 영을 접촉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영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나를 접촉하고자 한다면 내가 어디에 사는지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 412절은 우리가 지성소인 우리의 영 안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쓰였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을 분별할 줄 모른다면, 오늘날 주님께서 거하시는 장소인 지성소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

 

하느님의 계획의 중심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공급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그분 자신을 분배하시는 곳이 바로 우리의 영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분별하고 주님을 접촉하기 위해 우리의 영을 사용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 성화되고 마침내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우리 믿는 이들을 하느님의 계획의 핵심에서 빗나가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몇 가지를 지적해보자!

 

첫째, 원수 마귀는 우리가 영을 분별하지 못하도록 유혹한다. 원수는 우리가 구원받자마자 선을 행할 것을 결심하도록 부추긴다. 사실 아무도 이 간교한 제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주님이시여! 저는 당신의 뜻을 행하기 원합니다. 당신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훌륭한 기도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에게서 나온 기도는 아니다! 그것은 원수에게서 나온 것이다!

 

요한15,3-5절은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라!

여기에는 자신의 노력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다만 내주하시는 분 안에 거하며,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허락하는 것뿐임을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이 우리를 통하여 표현될 것이다! 알렐루야!

 

열매를 맺는 것은 다만 내주하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결과일 뿐이다! 나는 가지요 그분은 포도나무이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 안에 붙어살아야만 하며, 그것은 자연히 그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히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율법적인 실로 큰 유혹이며,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데서 멀리 빗나가게 하는 것이다! 알렐루야!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http://cafe.daum.net/yoondaniel 영적 성장과 영적인 사람에 대한 연구를 독서하시기를!>

 

둘째, 교리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성도들을 오히려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게 하기 위해 원수가 사용하는 또 다른 도구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사를 보면 수세기에 걸쳐 영원 보증, 예정, 절대 은총, 자유의지, 시대들, 성모 마리아 숭배사상, 연옥, 삼위일체, 신학교육, 미사를 위한 각종 의식과 교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살아계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게 하는 원수의 유혹으로 이용당했다고 말하겠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과 살아 계신 주님을 아는 문제는 전혀 별개이다! 더욱이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말씀 전례를 극히 형식화함으로써 각종 축일의 의미나 세상적인 이야기들로 전락시켰다. 성찬 전례와 참여를 미사의 중심으로 택하고, 그 분배권(?)을 사제로 제한함으로써, 이 같은 의식 위주와 형식주의가 사제로 하여금 평신도 위에 군림하도록 하는 교권을 확립케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가톨릭교회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된 국가 체제로 전락됨으로써, 수세기가 흐른 오늘날 사제들은 물론이고 평신도까지 말씀의 바보들로 만들어 버렸다. 마치 유대교처럼, 하느님을 아는 것보다 종교적 열심주의자들로 변질시켜, 종교적 열심이 구원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제 말씀이 없는 가톨릭교회는 필연적으로 세속화와 우상숭배라는 원수 마귀의 권세 안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동안 말씀의 준비도 전혀 없이 심지어 미사 중에 술 냄새를 풍기며 빵을 분배하는 사제들을 여러 번 경험하였다. 불행하게도 이의 쇄신 없이는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인데, 그 개혁과 쇄신의 방향이 해방신학 등 이단들의 득세로 대체되면서 보다 나쁘게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구체적인 내용은 요한묵시록 연구에서 설명할 것임).

 

셋째, 은사에 대한 오해들이다. 원수 마귀가 이용하는 또 다른 것은 영적인 은사이다! 하느님의 계획이 은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려면 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과거 성령세미나에 참석해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없고 체험과 은사 위주의 세미나가 계속된다. 그리고 말씀을 전해야 할 사제는 이 행사의 개최를 못마땅해하거나, 마지못해 승인하거나, 승인한다 해도 마지막 날 미사 때에 얼굴을 내미는 정도가 보통이었다. 이처럼 체험이나 은사에만 집착하고 그리스도를 접촉하기 위해 영을 분별하는 일을 소흘히 하는 것은 자칫 우상숭배나 원수에게 미혹당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하느님의 능력이요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바오로의 유일한 의도는 은사와 표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지혜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데 있었다! 은사가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목표와 표적은 아니다! 표적은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은사들은 다만 이 표적을 깨닫도록 우리를 도와줄 뿐이다.

 

1코린 14장에서 바오로는 교회의 영적 유익을 위해 우리의 영을 훈련하라고 격려한다! 비록 바오로가 다른 사람보다 방언을 뛰어나게 했을지라도, 그는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는 집회에서 깨달은 다섯 마디의 말을 하기를 원했다(1코린14,18-19). 바오로는 은사를 사용하라는 격려보다는 바로잡는 가르침으로 코린도인들을 조정해 주고 있다. 우리는 모든 은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존재하며, 적절하고 균형있게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가톨릭교인들이 점집이나 무당을 가장 많이 찾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수도회의 기도회에 참석해보면, 이곳 역시 하느님의 말씀이 없으므로 체험과 은사만을 강조한다. 그러니 온통 병고치고 집안의 복을 비는 기복신앙자로 가득 할 뿐만 아니라, 기도회에 참석하면 병고치고 복을 받는다고 공공연히 선전한다. 그 결과 수도회의 치밀하게 계산된 계획에 따라 돈이 몰리고 몰려 재벌화되기도 한다! 엄격히 말한다면, 이들이 매달 행하는 기도회는 이단들의 행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것이 원수 마귀의 교묘한 미혹이다!

 

하느님의 계획의 핵심은 우리 영 안에 살아 계신 영이신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계획의 열쇠라는 것을 분명히 알자! 우리는 이 열쇠에 모든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상,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서 이미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깨달았다면 어떤 종류의 가르침이나 은사에 특별히 주의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것 중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주님을 접촉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경륜의 표적이다! 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침과 은사를 주실지라도 그 목표는 곧 만유를 포함하신 주님 자신이다! 그분 자신 이외의 어떤 것에도 정착하지 말라!

 

하느님의 계획의 목적은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 곧 성령께서 우리의 영 안에 사시는 것이다! 온종일 우리는 우리의 영 안으로 돌이키기를 추구하며, 영을 분별하여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접촉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이 때 만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훈련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올바르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열쇠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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