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11-08 조회수1,579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
  
Amen, I say to you,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 contributors to the treasury.
(Mk.12,43)
 
 
제1독서 1열왕 17,10-16
제2독서 히브 9,24-28
복음 마르 12,38-44
 

언젠가 방송을 보다가 어느 목사님이 십일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것을 되돌려드리기 위해 십일조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며,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십일조를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모세율법을 굳이 지킬 필요가 없어졌지요. 예를 들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고, 율법에서 금지한 돼지고기를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은행에 예금을 해서 이자도 받을 수 있지요. 또한 원래 안식일이었던 토요일 대신 주일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십일조를 꼭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율법을 반드시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면, 미망인이 된 형수를 아내로 받아들여야 하고, 수많은 처첩을 거느려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예루살렘 성전도 가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십일조의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은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이 십일조를 지금의 시대에 적용하면 너무나 불공평해집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다들 비슷비슷해서 빈부의 격차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빈부의 차가 너무나 크지요. 따라서 한 달에 1,000만원 버는 사람이 100만원을 봉헌하는 것과 한 달에 100만원 버는 사람이 10만원 봉헌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1,000만원 버는 사람에게는 100만원이 생활하는데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100만원 버는 사람에게 10만원은 너무나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십일조는 형평에 맞지 않는 과거의 율법인 것입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내어 놓아야 한다고 하지요. 단순히 십일조를 봉헌했다고 해서 올바른 신앙인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받은 만큼 주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봉헌을 해도 주님의 사랑에 비교할 때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어느 본당에서 주임신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교무금과 주일헌금 내지 않기 운동을 벌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내는 교무금과 주일헌금으로 교회가 유지되고 성장한다는 착각입니다. 교회가 유지되고 성장하는 것은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입니다. 과부의 헌금은 그 무게가 아니라 그것을 봉헌한 선한 의지로 재어진다는 것입니다. 하긴 지금 소유하고 있는 재물의 양은 하늘 나라의 심판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과부가 봉헌한 돈의 양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녀의 아낌없는 마음만 보십니다.

십일조라는 어떤 형식에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즉, 십일조를 봉헌했다고 하늘 나라의 열쇠가 주어졌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 봉헌을 통해 자기를 합리화하고 스스로를 대단한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처럼 얼마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되돌려 드릴 수 있는 아낌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다(카프카).


가난한 과부의 헌금.

 

희망이라는 지도(‘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아프리카의 밀림지대에 파견된 한 병사. 그가 파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부대는 밀림 한가운데서 적들에게 포위당해 그 병사만 빼고 전멸하고 맙니다.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를 구하러 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6개월 뒤 그 병사는 혈혈단신으로 밀림을 헤쳐 나와 구조되었습니다. 병사를 구출할 당시 병사의 손에는 지도 하나가 꼭 쥐어져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말했습니다.

"역시 그는 밀림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난 거야!"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종이에는 밀림의 지도가 아닌 영국의 지하철 지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지하철 지도를 보면서 살아서 조국에, 그리던 영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되새기면서 그 위험한 밀림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 순간을 잘 이겨냅니다. 그러나 희망이 아닌 절망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지요. 사실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을 보면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라고 항상 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계속된 실패와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희망은 어떤 것인가요? 절망에는 조금도 눈길을 주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 편입니다.



수도권 지하철 지도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