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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찌할꼬! 주님!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3)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5-11-12 조회수933 추천수2 반대(4) 신고

어찌할꼬! 주님!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3)/ ††† ! 영원한 십자가여!(3) (히브10,19-20)

 

 

히브10,12절은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라고 말한다. “한 영원한은 속죄를 위한 주님의 제사가 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분이 한 번 사람을 대신하여 속죄하신 것으로 족하다. “죄를 위한 영원한 제사는 그분의 속죄제의 효력이 영원할 뿐만 아니라 그 제사도 영원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영원토록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도 영원하다!

 

우리는 십자가가 이천년 전의 지나간 사실만이 아니라 오늘도 새로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묵시13,8절은 창세 때부터 죽음을 당한 어린양 (the Lamb that was slain from the creation of the world)”(원문 참조)이라고 말한다. 가톨릭성경은 이 부분을 명백히 오역하고 있다. 창세 이후로부터 오늘날을 거쳐 영원까지 우리 주님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시다! 곧 그분이 보시기에 십자가는 이천년 전의 일이 아니라 창세 이후로부터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분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장래 구속의 대가를 미리 아셨다. 사람을 지으실 때부터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같다. 골고타에서의 한 번의 죽음은 영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의 질고를 어떻게 담당하셨는지를 표명한다. 주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떠나시기 전부터 십자가의 고난을 아셨다! 십자가는 영원 전부터 하느님의 마음속에 있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 심오한 뜻을 어떠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분은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말세에 한 번 나타나셨지만, 창세 이후로 세상 사람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고 애석해 하며 십자가의 고통을 얼마나 맛보셨는지 모른다!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구약의 사람들은 장래의 십자가를 믿고 신약의 사람들은 과거의 십자가를 믿는 것 같지만, 사실 십자가는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신약시대의 사람들의 십자가가 현재의 것일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의 사람들의 십자가도 현재의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 주심으로 십자가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기를 바란다! 많은 믿는 이들이 십자가를 이천년 전의 일로 계산하고, 낡고 오래되고 늙은 십자가로 생각한다. 세계 역사에서는 그리스도의 골고타가 옛 일이 되었지만, 믿는 이들의 영적 생명의 역사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전히 새로운 것이요 묵은 것이 아니다!

히브10,19-20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이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구약의 장막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성소라 부르고, 둘째 부분은 지성소라고 부른다.

 

두 부분 사이에는 휘장이 있어서, 지성소에 들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휘장을 지나야 한다. 지성소는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곳이다. 일반인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자기와 백성의 죄를 위하여 홀로 들어가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하여 언제든지 지성소에 직접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휘장을 통과해야 한다. 휘장은 주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갈라졌다. 휘장이 갈라지지 않으면 사람이 통과할 수 없다. 주 예수님이 몸을 드려 죽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그분을 거쳐서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앞에 직접 나아올 수 있는 것이다!

 

휘장을 통과하는 길을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열어 주셨다. 이 길은 새롭고 산 길이다! “새롭고의 원문은 새로 드린”, “새로 만든을 뜻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새로움을 본다! 대제사장은 작년의 제물이나 희생을 의지할 수 없다. 대제사장에게는 마땅히 새로운 제물이나 희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희생의 피, 곧 예수의 피에 의존해야만 감히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갖는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주님의 몸을 거쳐서 하느님 앞에 나올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새롭게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우리의 제사는 항상 새롭다! 알렐루야! 주 예수님의 십자가는 연대가 오래 됐다고 해서 묵은 것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처럼 오늘도 신선함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나올 때마다 십자가의 신선함을 볼 수 있다!

 

대속죄일 당일에 대제사장에게 새로 드릴 제사의 피가 없었다면 작년의 희생이 금년의 범죄를 속량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죽게 될 것이다. 만일 하느님이 주님의 속죄를 새로운 희생으로 보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벌써 멸망했을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항상 새로운 십자가로 인해 주님께 감사하자!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갓 이루신 일로 보신다!

 

이 길은 또한 산 길”, 또는 영원한 산 길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 길은 새로 만들어진길이며, “영원히 산 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성취하시고 우리를 하느님 앞으로 이끄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미 죽으셨고 그의 대신 죽으심이 오늘날까지 지속됨을 알 뿐만 아니라 그분이 부활하셨고 그의 부활도 실로 오늘날까지 지속됨을 안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오늘날까지도 신선하다! 우리에게는 신선하신 속죄주(贖罪主)가 있다. 그러므로 응당 그분을 받아들이고 의지하여 하느님 앞에 나와 그분의 사하심과 축복하심을 얻어야 한다.

 

묵시5,6절은 요한이 하늘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았는가를 기록하였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갓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요한이 본 하늘에 계신 주님은 골고타에 계실 때로부터 여러 해가 지났지만 갓 죽임을 당하신 것 같았다. 여기서 신선함으로 번역할 수 있다! 영원한 세대에 와서도 하늘에 계신 주님의 죽임 당하심은 여전히 신선한 것 같다!

 

! 십자가는 영원히 신선하다! 참으로 십자가는 만대를 거쳐도 항상 신선하다! 장래 하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십자가의 구속은 여전히 신선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낡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영원한 세계에 관한 요한묵시록에서 그의 아들을 어린양이라 부르셨다. 이 어린양은 갓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 영원한 상처는 영원한 구원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갓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우리의 영원한 기념이 될 것이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느님은 그 아들의 십자가의 영원한 가치를 아시고, 그의 아들이 십자가의 영원한 새로움임도 아신다. 하느님은 구속받은 믿는 이들이 이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십자가의 새로움을 알 때 능력과 사랑이 있으며 승리와 인내가 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십자가의 신선함을 안다면 십자가로부터 어떠한 계시와 감동을 받게 될지 모른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십자가가 옛 것이 아니라면 주님과 더욱 친밀한 친교를 가지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과 영과 생각 속에서 그분의 십자가가 항상 새로워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1코린11,26절은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원문 참조)라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때마다에는 항상의 의미가 들어 있다. 주님이 만찬을 세우신 것은 그분의 구속함을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그분을 기념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십자가를 옛 것으로 생각할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만찬 때에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유혹과 시험이 오고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십자가의 신선함을 잃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항상 만찬을 거행하여 그분을 기념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에는 십자가가 매우 신선했으나 한동안의 시일이 지나면 십자가가 아주 흐려진다. 우리가 십자가의 승리를 처음으로 알았을 때는 십자가를 아주 신선하게 본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의 영광을 습관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일반적인 것으로 변한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신선함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시므로 더욱 기념하게 하려고 그분의 죽으심을 우리 앞에 항상 두시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주님의 십자가를 역사상의 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느 때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이 우리 눈앞에 밝히 보여야 한다(갈라3,1). 갈라티아서는 십자가에 관한 서신이다. 갈라티아 사람들의 눈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였다면, 그들은 아주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행하여 성령을 받고, 육체를 의지하여 온전함을 얻으려 했으므로, 십자가의 신선함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는가? 아니면 낡은 종교와 전통을 믿는가?

분명한 것은 가톨릭교회는 신약 곳곳에서 사도들이 그렇게도 엄중히 경고하고 있는 유대주의와 이교도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함으로써,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을 완전히 왜곡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교회법과 교리로 확정함으로써, 수세기 동안 이의 진실을 외치는 수많은 신실한 믿는 이들을 화형에 처해 왔다!

 

주의 만찬을 매일의 희생 제사로 성체 성사를 교묘히 혼합하였고, 우리의 영이 바로 지성소인 성전이며, 주님께 직접 나아갈 길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고백을 사제에게 굳이 해야 한다는 이상한 고해성사라는 제도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무시하고 구약의 율법, 곧 제사장 시대로 되돌려 놓은 희대의 이단적 성사라고 할 수 있겠다!

 

가톨릭교회의 미사고해성사에 대해서는 성경에 단 한 줄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연구한다면, 이 모든 것이 자명하게 밝혀질 것인데! ?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만들었을까? 왜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까? 참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

 

가톨릭교회에서 오랜 교육을 받은 성직자 수도자들은 이를 부정하며 나를 힐난하고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만든 교리에서 벗어나, 성경을 직접 읽고 확인해보라!

전통과 교리는 변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거짓된 것을 드러내는 능력이다! 당신도 진리로 자유함을 얻기 위하여 담대히 도전해보라! 그래야만 교회 안에 개혁과 갱신(更新)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우리의 영적 생명은 우리가 십자가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 중 어떤 이가 십자가를 묵은 것으로 본다면, 이는 그가 이미 능력의 근원을 잃었음을 말해 준다! 우리가 새롭고 산 길”, “영원한 십자가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하자!

알렐루야! 아멘

 

 <이어지는 글들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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