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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3주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5-11-15 조회수682 추천수5 반대(0)

요즘 거리를 가득 메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뒹구는 낙엽입니다. 낙엽을 보면서 문득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앙 안에서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간 존재의 종국적 운명, 때로는 사후(死後)의 운명에 관한 것으로 영혼의 불멸몸의 부활이라는 두 가지 상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두 가지를 아울러 가졌습니다. 영혼의 불멸은 그리스적 상징이라고 하고, 몸의 부활은 히브리적 상징이라고 합니다.

 

순수이념의 초월계(이데아)와 그것의 그림자라는 현실계는 그리스 철학이 가지고 있는 이층구조(二層構造)의 세계관입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의 감옥이자 그 무덤인 몸을 떠나서 이데아의 세계에서 영원불멸의 존재가 된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서 시간적 미래, 역사의 지평을 그 삶의 자리로 삼고 있는 히브리적 전통에서는 미래의 새 시대가 시작되면 실체적인 인간이 부활한다고 봅니다. 아마도 그리스에서는 본래부터 노예와 자유인의 이층구조의 사회가 이층구조의 형이상학을 산출하여 그 이층구조의 사회구조를 정당화시켰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대해서 히브리에서 하느님 백성이라는 단층구조의 공동체 내에는 그 사회가 낡아지면 다시 사회가 새로워진다는 약속과 희망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은 위의 두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영혼의 부활, 몸의 부활) 그러나 콘스탄탄의 종교, 역사적 그리스도교에서는 실제로 히브리 전통 보다는 그리스 전통이 우세했습니다. 서양 그리스도교, 서양사상에서는 줄곧 영혼의 불멸상징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그리스도교 특유의 상징인 몸의 부활상징은 줄곧 가려진 열세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영혼 불멸의 상징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그때그때 개별적인 존재로 불멸의 영이 됩니다. 그러나 몸의 부활 상징에 의하면 우리는 기다렸다가 다 같이 한꺼번에 부활합니다. 전자는 개별 인간의 운명에 대한 상징(개인적 상징)이요, 후자는 인간존재의 사회적 운명에 대한 상징(사회적 상징)입니다. 사후의 불멸 영혼은 영원한 천국에 개인적으로 들어가지만, 부활의 경우에는 역사적인 미래에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집단적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연결되는 부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신앙, 가장 기본적인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뿌리가 되는 구약성서는 사후세계에서의 부활을 알지 못합니다. 고대 근동의 모든 나라들이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데 비해 구약은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아마 그러한 이유는 그들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야훼신앙의 핵심적 구성원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을 쌓고 피라미드를 건설하도록 강제노동에 시달렸습니다. 현대의 한 과학자는 그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피라미드를 하나를 건설하는 데는 20만 명의 노동자가 20년간 부역을 해야 된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20만 명의 가장 젊고 힘 있는 꽃다운 생애를 송두리째 바쳐야합니다. 이러한 세계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사는 세계였고, 이들의 종교는 죽음을 위한 종교였습니다. 이집트의 이러한 반민중적 종교에 대한 철저한 각성과 반동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도록 강요한 것일 것입니다.

 

구약의 부활신앙이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반면에, “엘리야가 다시 온다.”역사 내의 부활신앙은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한 신앙이 아니고 이 세상이 새롭게 갱신되는 것을 말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민중이었고 그들의 지도자였습니다. 아합의 권력에 의해 쫓기고 쫓기며 온갖 박해를 한 몸에 받았던 민중 엘리야가 이 땅에 다시 와서 새 시대를 열고, 주인이 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시대의 민중은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서 엘리야가 부활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를 가리켜서 세례자 요한이 부활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엘리야 - 요한 - 예수로 이어지는 메시아 신앙, 부활신앙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생활을 하던 때에 그들의 해방에 대한 열망은 새로운 출애굽” “2의 출애굽사건으로 나타납니다.(2이사야) 또한 그들은 가장 전성기였던 다윗의 시대, 다윗의 나라가 다시 오기를 꿈꾸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에서 볼 수 있듯이 부활신앙이란 개인이건 역사적 사건이건 간에 변혁이 좌절된 시기에, 민중이 절망감에 빠져 있던 시기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으로 다시 민중을 동력화하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은 사후의 세계, 저 세상에서의 부활이나 또는 개인의 부활에 초점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역사 내의 변혁이며, 민중의 집단적 희망의 실현이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 전례는 이제 곧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변함없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지성과 감성을 지닌 인간은 의미의 시간을 추구합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축일이 있습니다. 국가에서 기념하는 기념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인 우리가 의미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물리적인 시간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미의 시간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가치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아침 햇살에 말라버리는 이슬방울과 같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선택받는 사람과 버림받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구원을 받는 길은 특별한 수행을 해야 하고, 많은 공부를 해야 하고, 세상의 삶에 성공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하느님께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세상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도,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진리의 길은, 깨달음의 길은 구원의 길은 아주 평범한 곳에 밝혀 놓으셨다고 합니다. 하늘의 별, 구름, 들의 꽃,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의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내가 변하는 만큼 세상은 그만큼은 변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구원의 문제도 그리 큰 숙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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