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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11-16 조회수1,057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Jesus asked him,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He replied, “Lord, please let me see.”
Jesus told him, “Have sight; your faith has saved you.”

(Lk.18,41-42)

 

 

제1독서 1마카 1,10-15.41-43.54-57.62-64
복음 루카 18,35-43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물질적 풍요다’에 “예”라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고 합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가 있어야 편하고 쉽게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고 해서 과연 행복할까요?

어느 연구소에서 이 물질적 풍요로 행복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그 결과 이러한 결론을 발표했습니다.

‘돈을 소중하게 여길수록 내용보다는 외형을 중요시하는 심리 상태가 되어 행복감이 줄어들게 된다.’

제게 어떤 형제님께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 고민은 가족 간의 갈등으로,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많은 재산이 있는데 이를 큰 형님께서 공평하게 나누지 않고 자신이 부모님의 모든 재산을 독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유산 문제가 없기 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던 가정이었지만, 상속 문제로 인해 완전히 남남이 되고 만 것입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돈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경우인 것이지요.

세상 것에 대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 그래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가 있으며, 또 이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문제는 주변의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계속해서 꾸짖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눈먼 이는 예수님을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병 자체를 하느님의 벌로 생각하고 있었던 그 당시였기 때문에, 이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큰 죄가 있어서 벌 받은 것이라고 여긴 것이지요. 따라서 이런 죄인은 예수님을 감히 만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관점을 뛰어 넘어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가치만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 주님을 뵐 수도 없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아서는 방해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가치를 둔다면 분명히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이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겠습니까?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영혼에서 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스피노자).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습니다.

 

사랑에 대해...

세 살 난 아들이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며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이거 먹어도 돼요?”

엄마는 우유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유통기한이 지났구나. 이거 먹으면 안 돼. 이건 아빠 거예요.”

어떤 책에서 우연히 보게 된 유머인데, 이렇게 똑같지는 않겠지만 배우자가 우선순위에서 물러나는 경우를 꼬집는 이야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소개해 봅니다. 솔직히 자녀에 대한 사랑은 정말로 지극한 것 같습니다. 갓난아기 때에야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시기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충분히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도 옆에서 일일이 다 챙겨주고 또 직접 해주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긴 요즘에는 자녀가 거의 하나둘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자녀라고 할지라도 배우자보다 우선순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바칠 정도로 신경을 써야만 아이의 성장이 가능한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인류는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입니다. 어떤 보호 없이도 스스로 잘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곧 부모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모든 것을 다 해 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자녀에 대해 온갖 정성을 다 바치고 있지만, 사랑이라는 이유 때문에 때로는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켜봐 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조금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해주지 않으시는 주님을, 사실은 모든 것을 다 주고 싶고 해주고 싶으시지만 사랑하시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를 지켜봐주고 계신 것은 아니었을까요?


극장 실내. 멋있어서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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