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12.12 토/ 세상만사 만인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는 눈 - 기 프란치스코 신부
작성자이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5-12-11 조회수1,082 추천수3 반대(0) 신고



대림 2주 토 마태 17,10-13(15.12.12)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마태 17,12)



The coming Elijah





세상만사 만인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는 눈

인류의 타락을 보시며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던”(창세 6,6) 하느님께서는 참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가 산 채로 승천해 있다가(2열왕 2,11)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에 다시 와서 백성을 화해시키고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믿었습니다(집회 48,10; 말라 3,1. 23 참조).

율법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마태 17,10).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7,12)고 하십니다. 예언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메시아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러온 두 번째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도 죽입니다(마태 14,3-12).

마침내 그들은 메시아 예수님마저도 신성모독죄로 몰아 십자가형에 처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죽임으로써 생명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단죄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 욕심에서 위대한 예언자로 칭송받았던 엘리야 예언자가 먼저 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고, 현세적 집착 때문에 요한과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길라잡이입니다. 요한은 잠깐 등장하여 의미 없이 사라져버린 조연이 아니라,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미리 보여준 (17,12) ‘하느님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예언자들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내몬 율법학자들처럼 행동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성당, 성상들, 거룩한 장소들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일상사, 사건들과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의 상징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원론의 잣대로 성(聖)과 속(俗)을 가르지 말고, 모든 것 안에 담긴 하느님의 음성과 언어와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눈을 떠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었으며 성경의 가르침을 잘 알았음에도, 요한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시대의 표징도 읽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또한 자기 생각과 신념에 매이고 자기 의지를 자기것으로 삼는 어리석음에 떨어질 때, 해방하러 오신 주님을 끝내 알아 뵐 수 없음을 알고 자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 때에 자기중심적이고 소유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 공생(共生)을 위해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는 거룩한 여백을 마련하였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telegram.me/kifran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