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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12-13 조회수1,234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12월 13일 대림 제3주일
 
The crowds asked John the Baptist,
“What should we do?”
He said to them in reply,
“Whoever has two cloaks
should share with the person who has none.
And whoever has food should do likewise.”
(Lk.3.11)
 
 
제1독서 스바 3,14-18ㄱ
제2독서 필리 4,4-7
복음 루카 3,10-18
 

이제 호주에서의 일정도 거의 끝나갑니다. 오늘 낮에 마지막 특강을 마치고 내일 새벽이면 이곳 호주를 떠나 한국으로 갑니다. 그래서 내일 새벽 묵상 글은 올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이곳 새벽 시간에 공항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묵상하고 글을 올릴 시간이 없을 것 같네요. 이제 하루 쉬고 15일(화) 새벽에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오늘의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합니다.

대통령 전용차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 가격이 어마어마하더군요. 왜냐하면 이 차의 성능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 않지만 무게가 2톤 가까이 나가는, 거의 장갑차 수준이라고 합니다. 방탄유리는 기본이고, 폭발물에 의해 타이어 4개가 모두 펑크가 나도 시속 80Km의 속도로 100Km 정도 달릴 수 있는 런플랫 타이어까지 장착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있지만, 신변 안전이라는 이유로 방탄차는 물론이고 많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활동의 제약을 겪는 대통령의 위치가 과연 행복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권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저는 온 몸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전혀 불안하지 않으며,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과연 권력이란 것이 좋은 것일까요? 막강한 힘을 구사할 수는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유를 억압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리가 더 행복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을 봅니다. 그는 광야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지요.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인기를 받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바로 메시아다.”라고 말만 했어도 세례자 요한은 더 큰 지지와 사랑을 얻었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속여서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무조건 복종할 수 있도록 하면 편안한 점이 더 많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할 만한 권력을 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며 더 큰 능력을 지니신 주님이 오심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면서 주님 앞에 작은 자라는 것을 이야기하지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을 걷어 차 버리는 말입니다. 세상의 권력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순명하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작은 자의 모습이 더욱 더 행복한 삶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작은 자의 모습도 기쁘게 선택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이렇게 주님 앞에 작은 자만이 곧 다가오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그의 사랑하는 사람의 선물보다도 선물을 보내주는 사람의 사랑을 귀중하게 생각한다(토머스 켄피스).


어제 강의를 했던 호주의 Normanhurst 성당 내부입니다.

 

두 마리의 토끼

어떤 연구소에서 두 마리의 토끼 다리에 깁스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보았지요. 그런데 이 두 마리의 토끼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토끼는 자신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깁스를 풀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것입니다. 그동안 먹이가 바로 옆에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깁스를 풀기에만 집중하고 있었지요. 그러다보니 점점 힘이 약해졌습니다.

다른 토끼 역시 처음에는 깁스를 물어뜯으면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깁스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깁스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평상시와 같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 토끼는 힘도 그대로고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똑같이 깁스라는 자신을 옭아매는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는 그 고통에만 집중했고 다른 한 마리는 그 고통을 무시하기 시작했지요.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고통에 집중한 토끼는 힘이 약해지면서 생명력을 잃은 반면, 자신의 고통을 무시한 토끼는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평상시와 똑같이 생활했습니다.

우리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똑같은 고통 속에 있어도, 이 고통에만 집중을 하다보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 고통을 무시하면서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삶의 기쁨은 계속될 수 있는 것이지요.

고통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계신가요?



호주 시드니 주교좌 성당 앞의 대형 구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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