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대림 제4주간 목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5-12-24 조회수1,038 추천수15 반대(0)

 대학교수들이 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혼용무도(昏庸無道)’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지도자가 있어서 나라가 어지럽다.’는 뜻입니다. 국방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 비리를 저질러서 엄청난 국고의 손실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메르스 때문에 전 국민이 두려워하고, 외국에서 오는 관광객들이 급감하는데도 책임지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시리아와 북한 등 일부 독재국가에서나 실시하는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추진하면서 국론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합니다. 이는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노른자를 얻기 위해서는 양심, 나눔, 헌신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헌신짝처럼 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올해 나름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책은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였습니다. 그 책에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커다란 기둥은 성문을 열기에는 유용하지만 작은 구멍을 막기에는 유용하지 않다. 쓰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는 고양이만 못하다. 재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어둔 밤에 벼룩의 털도 볼 수 있지만 환한 대낮에도 큰 산을 보지 못한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강물들이 모일 수 있습니다. 바다는 깨끗한 강물만 선택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더러운 것, 오염된 것들도 말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만큼 깊고 넓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커다란 배를 움직이게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남을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바다에서 모든 생명들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내년 대학교수들이 선택한 사자성어는 산해숭심(山海崇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바다와 같이 넓고 깊었으면 좋겠습니다. 높은 산처럼 품위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통합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바라보기 보다는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속상한 일, 화나는 일, 원망이 생겨나면 그것과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귀의 고삐를 잡고 당기면 나귀는 내 곁에 머물게 되듯이, 원망, 분노, 미움의 고삐를 내가 계속해서 잡고 있으면 결코 자유롭게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의 고삐를 놓아버리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수련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합니다. 즈가리야는 의심이라는 고삐를 잡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의심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의심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즈가리야에게는 수련과 침묵이 필요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는 날, 즈가리야는 수련과 침묵을 끝낼 수 있었고, 이제 의심이라는 고삐를 놓아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즈가리야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권능을 받아들인 즈가리야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는 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존하신 분의 예언자가 되어야 하고, 그분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제 성탄은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들에게 평화!’라고 노래를 합니다. 주님의 성탄이 모두에게 즐겁고, 평화롭고, 희망의 소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의 성탄은 번뇌와 갈등, 욕망과 미움의 고삐를 놓아 버리는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수련과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지구별에서 생명의 시작은 40억년이 넘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영원한 생명과 같습니다. 많은 시련과 몇 번의 멸종이 있었지만 생명은 모습은 바꾸었을지언정 본성은 잃어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분명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40억년 동안 길을 찾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생명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제 곧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현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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