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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5-12-29 조회수1,349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5년 12월 29일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When the days were completed for their purification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the parents of Jesus took him up to Jerusalem
to present him to the Lord,
(Lk.2,22)
 
 
제1독서 1요한 2,3-11
복음 루카 2,22-35
 
한 쌍의 부부가 유람선에서 조난을 당해서 구조선을 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선에는 자리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때 남편은 아내를 침몰하는 유람선에 남겨두고 혼자 구조선에 올랐고, 이 남편을 향해 아내는 무엇이라고 외쳤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내가 남편을 향해 분노의 말을 퍼부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에게 외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를 잘 부탁해요.”

사실 당시의 아내는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었지요. 남편은 아내와 최후를 배에서 함께 하려고 했지만, 어린 딸은 어떻게 하냐는 아내의 설득에 홀로 구조선을 탔던 것입니다.

처음의 상황만을 본다면 분명 아내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매정한 남편, 그리고 자기만 사랑하는 이기적인 남편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사정을 들어보면 남편의 판단이 옳았음을 그리고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상대를 가볍게 판단하고 단죄를 하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은 육신으로 아기 예수님을 뵙는 특권을 누립니다. ‘하느님을 직접 보고 또 당신의 품에 안았으니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특별한 눈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특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말도 하지 못하고 누구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연약한 아기를 누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신앙의 눈을 가진 이만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 직접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심지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분명한 표징을 보여주시는 주님을 믿지 못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았습니까?

그냥 눈에 보이는 모습만을 보고 가볍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눈으로는 절대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메온은 신앙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 연약한 아기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신앙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기도 안에서 참 주님을 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휴식은 게으름을 피우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여름날 나무 아래서 잔디에 누워보고 물의 속삭임을 듣기도 하고, 하늘 위를 가로질러 떠다니는 구름을 쳐다보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존 러벅).

 
렘블란트의 성 시메온의 예언

 

연필이 좋아요

사람들은 제가 글을 쓸 때 컴퓨터를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긴 인터넷 상으로 글을 올린 지가 벌써 15년이나 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글을 쓸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연필입니다. 깎을 필요가 없는 볼펜이나 사인펜이 아닌 닳을 때마다 깎아야 하는 연필을 사용한다고 하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시지요.

우선 빈 종이에 연필로 쓰다보면 지저분해지기는 하지만 글이 쉽게 정리되어 써집니다. 또한 하루 동안 연필이 닳아 없어진 숫자를 보면서 괜히 무엇인가 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각거리는 연필 쓸 때의 감촉 역시 저의 기분을 너무나도 좋게 하기 때문에 연필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스마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모든 것들이 단순화되고 편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편한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느리고 불편하지만 그 안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더 좋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일상 안에서의 소소한 행복들, 불편하고 힘든 것들 안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편하고 쉬운 것만을 찾으면서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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