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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오시는 분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02 조회수1,064 추천수7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다해 주님 공현 대축일


<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


복음: 마태 2,1-12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


안젤리코 작, (1450), 프레스코, 169x134 cm, 피렌체 성마르코 박물관


<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러 오시는 분 >

 

하느님께서 왜 당신 아드님께로 인도하시던 별을 사라지게 하셨을까요? 사실 이것이 결국 헤로데의 격분을 사게 만들어 베들레헴의 수많은 아기들이 살육을 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헤로데에게 당신 아드님의 탄생을 알리려 했던 것인데 그렇다면 그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란 주님은 당신을 공평하게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다만 인간이 눈이 가리워 그 주님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어린왕자는 바로 관계와 사랑의 시작점에서 우리가 무언가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정말 잘 표현해 주는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B612라는 아주 작은 별에 살고 있던 어린왕자는 매우 당혹스런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의 별에서는 당연히 자신이 왕입니다. 그래서 바오밥 나무의 싹이 자라나면 그 큰 나무가 작은 혹성을 다 집어삼키지 않도록 부지런히 그 싹들을 뽑아버립니다. 그러던 중 이상하게 생긴 싹이 하나 돋아납니다. 그 싹은 어린왕자의 정성스런 보호로 아주 아름다운 꽃이 되었습니다. 어린왕자는 그 꽃을 사랑합니다. 그 꽃도 어린왕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꽃은 기침을 하며 자신을 잘 보살펴주지 않는 어린왕자를 탓합니다. 어린왕자는 꽃에게 유리 덮개를 해 주었지만 꽃의 심술은 점점 더 해 갔습니다. 목마르다, 춥다, 덥다, 벌레 잡아 달라 등 어린왕자를 괴롭혔고 어린왕자도 조금씩 지쳐갔습니다. 그렇게 어린왕자가 지쳐갈 무렵 그것을 눈치 챈 꽃은 자기에게도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가시가 네 개나 있다고 하면서 그 유리 덮개를 치우고 떠나버리라고 말합니다. 어린왕자는 꽃을 뒤로 한 채 먼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 하면서 보는 많은 다른 별들의 주인들은 참으로 신기할 따름입니다. 각 별마다 한 사람씩 주인이 있는데 각자가 어떤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며 외로움을 잊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혼자 앉아서 왕이라고 합니다. 신하도 없습니다. 누구는 하루 종일 돈만 셈합니다. 누구는 길거리 가로수 등을 켜는 일만 열심히 하고 누구는 하루 종일 술에 취해 있고 누구는 별만 셉니다. 각자 무언가에 골몰하지만 왠지 행복해보이지는 않습니다. 행복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일에 바빠서 어린왕자와 이야기 할 시간도 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헤매다 도착한 별이 지구입니다. 지구에서는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양을 그려 달라,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를 그려 달라 졸라도 끝까지 참아내며 잘 그려주는 사막에서 길을 잃은 비행사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리의 여우를 만납니다. 그리고 여우와도 친구가 되려고 하지만 여우는 그렇게 쉽게 어린왕자를 받아주지는 않습니다. 하루에 조금씩만 더 다가오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길들여달라고 말합니다. 길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길들임은 곧 자신을 상대를 위해 조금씩 내어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어린왕자는 지구에서 친구를 사귐으로써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관계 맺는 법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이전에 자신에게 의미가 있었던 꽃이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꽃에게 돌아갈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꽃을 떠나온 것은 너무나 성급한 일이었습니다. 관계는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인데 누군가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야생말을 길들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꽃이 사실은 어린왕자를 길들이고 있었고 어린왕자도 꽃을 길들였어야 했던 것입니다. 길들임은 자신을 버리는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로 제자들을 길들이는 과정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자신이 죽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볼 수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예수님 때문에 죽여 그분께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결국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그 무엇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괴롭힘 당하는 것을 원치 않고 죽기를 원치 않는다면 관계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통해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것만 깨닫게 된다면 나의 영원한 폭력자였던 나 자신을 죽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된 상대를 그 존재만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은 어린왕자는 자신이 죽어야만 꽃에게 갈 수 있음을 알고 뱀에 물려 죽는 결말을 택합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길들이시기 위해 죽으신 것과 같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죽이지 못하면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종살이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별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혼자 왕 노릇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왕 노릇을 놓기가 두렵습니다. 다른 누군가 때문에 자신이 죽을까봐 두렵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관계 맺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다면 자신을 버릴 마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모두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그분 때문에 내 자신이 죽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방식도 당신을 죽임으로써입니다. 세상에 내려오신 것도 죽음이고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여주셔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도 죽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합니다. 누군가가 내 자신을 죽여줄 수 있는 존재로 내게 다가올 때, 그것이 참으로 고마울 때 그 관계가 참 관계인 것이고 그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는 내게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자의 모습은 당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사람들이 아직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그분 때문에 죽게 되는 것을 참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공현이란 공적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뜻인데 아무리 공적으로 드러내셔도 보려고 하는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어린왕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어두운 영화가 있는데 무뢰한이라고 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버릴 수 없으면 절대 상대의 사랑이 보일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전도연은 형사 김남길이 쫓고 있는 잔혹한 살인자의 애인입니다. 직업은 술집 마담입니다. 김남길은 잠적한 살인자를 찾기 위해 전도연에게 접근합니다. 전도연도 터프한 형사인 김남길이 싫지 않습니다. 김남길도 술집 마담이지만 순수한 애정을 지닌 전도연에게 빠져듭니다. 그러나 전도연은 여전히 살인자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결국 전도연을 만나고 있는 살인자인 애인을 그냥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에게서 벗어나도록 총으로 쏴 죽입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자신의 애인이 죽었음을 비관하여 자신을 더욱 망가지게 합니다. 더 이상 내려갈 대가 없을 만큼 망가진 전도연을 차마 볼 수 없어 그녀를 구해주려 하지만 전도연은 자신의 애인을 죽인 김남길을 칼로 찌릅니다.

 

예수님도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사랑해 왔던 우리 자신을 죽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사랑에 이미 눈이 멀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공현 대축일은 자기를 놓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어쩌면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사는 창공에서 노래하고 하늘엔 다윗의 별이 찬란히 빛납니다. 그래도 보지 못하니 이미 그 길을 가고 있는 동방박사들을 통하여 주님이 오심을 알립니다. 그 복음의 소식은 내 자신을 죽여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분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왕 자리를 내어놓던가 아니면 내가 왕이 되기 위해 그분의 사랑에 눈을 감아버리던가. 우리는 동방박사들입니까, 아니면 헤롯 왕입니까? 둘의 차이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삼왕은 자신들의 왕위를 내어드렸고, 헤로데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려 했던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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