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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15 조회수1,094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6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him,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Mk.2,5)
 
 
제1독서 1사무 8,4-7.10-22ㄱ
복음 마르 2,1-12
 
어느 재벌총수는 자신의 측근이나 직원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 어렵다고 이야기하거나, 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으면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이봐, 해봤어?”

사실 많은 이들이 해보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쉽게 안 된다고 판단하고 포기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마음이 들 때에 “항구에 머물 때 배는 언제나 안전하다. 그러나 그것은 배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라는 존 A.셰드의 명언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배의 존재 이유가 단순히 안전하게 항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존재 이유 역시 편안하고 쉬운 것만 행하면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쩌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요?

며칠 전에 제가 있는 성지 사무장님이 봉사자들에게 줄 축일 축하 카드를 써달라면서 빈 카드를 주시더군요. 제 전임 신부가 봉사자 축일 카드를 직접 써서 주셨다면서 말이지요. 저는 이 카드를 받자마자 “꼭 제가 직접 카드를 써야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카드 내용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워낙 악필이라서 직접 글 쓰는 것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사실 학창시절에는 늘 반의 서기를 도맡아 했었습니다. 심지어 군대에 가서도 글 쓰는 것은 모두 저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점점 글을 쓰지 않게 되었고, 제 글은 어느 순간 저 조차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 악필이 되었던 것이지요.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악필이 된 것이지, 원래부터 악필은 아니었음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즉, 저는 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친구를 데리고 온 오늘 복음을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중풍을 앓고 있는 친구를 데려가고자 했지만, 사방에서 밀려 대는 군중 때문에 가로막혀 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곧잘 일어나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육적인 게으름으로 기도를 멀리하는 모습들, 주님 것보다는 세상 것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들,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들, 사랑 대신에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려는 마음들...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쉽게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앉곤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로 중풍을 앓고 있었던 친구들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친구들은 예수님 앞을 가로막는 군중들 사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또한 그냥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그리고 그 지붕을 과감하게 뜯어버리는 용기도 필요함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 삶 안에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존재 이유는 포기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행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자가 패배 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다(장파울).


십자가.

 

지는 것.

저는 어렸을 때 바둑 두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형님들이 바둑을 즐겨 두었지요. 저 역시 바둑을 배우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님께 바둑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요. 그때 형님께서는 바둑판 위에 검은 돌 48개를 먼저 깔아주고서는 바둑을 두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엄청나게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저의 모든 집을 빼앗겨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저는 바둑을 포기했습니다. 해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형님은 무조건 두 집만 나면 사니까 어떻게든 살도록 해보라고 했지만, 두 집을 못 냈던 저는 그 이후로 바둑알을 만지지도 또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거의 초단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형에게 처음 바둑알을 만져본 사람이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지는 것이 당연한데도 비참하게 졌다는 이유로 아예 포기했던 것이지요.

지는 것을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지 않기 위해 다시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발전된 내 모습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어떠한 삶이든 내 것으로 기쁘게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스파게티도 만들어 먹으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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