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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용서받아야 할 죄인인 우리는 /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16 조회수770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파스칼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스스로를 의인이라는 죄인들이요, 두 번째는 스스로를 죄인이라는 의인들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진정 죄인이라는 이들께는 예수님이 그 누구보다도 필요한 분이시다. 우리는 주님을 애타게 찾고 그분의 도움을 얼마나 간절히 청하는 죄인이다. 만일 주님의 도움 없이도 홀로 잘 산다는 이는 진정한 의인이기보다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만 생각하는 죄인일 게다.

 

‘견원지간(犬猿之間)’은 개와 원숭이 사이이다. 좋지 않은 관계일 때 이 비유를 곧잘 쓴다. 실제로 개와 원숭이는 잘 지내지 못한다. 동물학자들이 그 원인을 밝혔는데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원숭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내리는데 개는 올린단다. 그 반대이면 원숭이는 올리고 개는 내린다. 신호 체계가 반대이기에 그렇다나. 이러하니 관계가 나빠질 수밖에 없고 그들 사이의 불화는 ‘숙명적’인 셈이라 할까!

 

하지만 사람은 다를 게다. 시각의 차이를 바꾸면 견원지간의 관계도 가까운 사이로 언제나 변화가 가능할 게다. 자신의 신호 체계로 상대를 보니까 오해가 생기는 게 당연하리라. 그러니 지금껏 자신의 입장에서 보던 것을 상대 입장에서 보면 될 것이니까. 우리는 어떤지. 이게 나와는 별 상관이 정녕 없는지. 더 나아가 자신은 정말 죄인이 아닌지, 영적으로 건강하기에 혼자서도 잘 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게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6-17)’ 어두움에 빛을 밝히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렇지만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항의한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느냐?” 율법의 시각 차이를 뚜렷이 드러낸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시각으로 보신다. 세리도 주님의 자녀라는 거다. 이렇게 매사를 ‘사랑의 눈길’을 지니고 보아야 주님을 닮는 삶이다. 그것은 자신의 신호 체계를 승화시키는 길이기도 하리라.

 

초기부터 교회는 완전하고 바른 이들로 시작된 곳이 아니다. 병원에 환자들이 모이듯, 비천한 죄인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다. 그곳 사목자, 봉사자도, 상처와 죄가 없어서 가르치고 봉사하는 게 아니다. 물론 어부와 세리도 힘없고 죄스럽지만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상처 난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였다. 외면하고 싶은 약함과 죄스러움이 오히려 주님께서 부르시는 장소이며, 이웃을 환대하고 ‘용서하는 자리’일 게다.

 

이렇게 예수님은 죄인들을 제자로 삼아 함께 식사하셨다. 우리들 대부분은 스스로가 죄를 전혀 짓지 않은 한없이 의로운 이라고 막연히 여긴다. 그러나 사실 많은 이가 그렇지 않을 게다. 죄 많은 이들이 교회가 칭송하는 인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다. 오로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회개를 끈질기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 덕분이리라. 환경은 사람마다 다르니 빈부 격차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대상일지라도, 인격은 모두가 같은 무게를 지녔기에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하는 사회라야 진정으로 참된 삶의 세상이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역 유지로, 또는 지식인으로, 저명인사나 상류층 인사로 대우받기를 전혀 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가난하고 병고에 시달리며 소외에 우는 이들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늘 무리를 이루며 따랐다. ‘나는 의인과 사귀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왔다.’라고 하신 예수님 삶에서 ‘우리 모습’을 살펴봄이 어떨까?

 

우리는 성경 속의 대부분의 위대한 이들은 전혀 죄짓지 않은 의로운 이라고 막연히 생각만 한다. 사실 많은 이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의 삶에서 알게다.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아내 사라이를 여동생이라고 속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통일을 이룬 다윗은 욕정에 이끌려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 세바를 기어이 아내로 삼았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 역시 막판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시침을 떨었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는 초기에는 ‘교회를 박해하던 이’였다.

 

죄 많은 이들이 칭송하는 인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닌, 오로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회개로의 길로 끈기 있게 이끄시는 하느님의 자비 덕분일 게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당신 제자로 삼으시고 그 많은 죄인, 세리와 함께 음식을 나누신 것은, 그들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셨기에. 어쩜 고해소 찾는 걸 두려워하는 우리도 진짜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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