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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물을 주는 사람, 포도주를 주는 사람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17 조회수1,043 추천수1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다해 연중 제2주일


<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


복음: 요한 2,1-11







그리스도(Young Jew as Christ)


렘브란트 작, (1656), 베를린 국립 박물관


< 물을 주는 사람, 포도주를 주는 사람 >

 

16세기 문예부흥 시대에 독일 정부가 국민 교육을 위해 두메산골에 많은 학교를 세우고 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어떤 시골 학교에 파송된 남자 선생님이 첫날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내일은 머리 깎고 세수하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오너라.”

아이들이 한결같이 더벅머리에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집에는 머리 깎을 가위도, 세수할 비누도, 갈아입을 새 옷도 없었던 것입니다. 실망한 교사는 포기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자원하는 한 여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첫날 아이들에게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올 테니 그때 종치면 모여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사흘 후 여 선생의 손에는 가위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머리를 하나하나 깎아주고, 비누로 얼굴을 닦아주고, 가지고 온 새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더 좋은 무언가를 줄 수 있음에도 그저 최선을 다했다며 자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만 주려고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주는 것은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L.A. 흑인 폭동으로 교민의 사업채 90% 정도의 손실을 입게 됐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슈퍼마켓 아주머니의 법치주의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음료수를 훔치고 아주머니를 폭행한 아이를 향하여 두려움에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법이 가져온 결과는 실로 막대한 심적·물적 피해였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나의 무언가를 채우기 위함이고 그런 행위는 결국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주로 변한 물을 퍼 나누어주는 하인들이 나옵니다. 우리 또한 포도주를 퍼 나르는 종과 같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정결례에 쓰이는 물동이에서 물을 펀 날랐을 것입니다. 하인들이라 표현됐지만 실상은 봉사자란 단어입니다. 참다운 봉사자는 물을 퍼 나는 사람이 아닌 주인이 주는 것을 전달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포도주는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정결례에 쓰일 물밖에 없습니다. 이웃의 옳고 그름을 가려주는 것입니다. 물동이 6개는 그리스도와 하나로 혼인하기 위하여 우리를 정결하게 해야 하는데 이는 곧 율법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누구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타인의 잘못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잘못을 깨닫기 위함입니다(로마 3,19-20 참조).

그러나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게 죄를 묻지 않는 예수님의 모습이며, 유산을 달라는 아들에게 군말 없이 유산을 내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결코 이성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참다운 신부가 되는 길은 법을 잘 따르는 길이 아니라 믿음에서 오는 성령을 통함임을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물이고 그저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사랑의 따듯함이 아니라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한 자매가 고민을 상담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따듯하게 받아주다가 그만 한계에 이르러 명확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실망한 듯 전화를 끊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올 때는 자신이 잘 했는지 잘못했는지를 판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의 봉사자는 내가 받은 성령의 열매를 전달해 주는 사람이지 내 힘으로 내가 줄 수 있는 무엇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 즉 물을 주는 사람들의 특징은 율법에 얽매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타인들을 판단하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타인을 판단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열등감 때문입니다.

 

미국 뉴욕 5번 가에 있는 까르띠에 매장에 69캐럿짜리 명품 다이아몬드가 전시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까르띠에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몇 십억의 거금을 투자해 구입한 것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전시되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이 그 다이아몬드를 구경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 다이아몬드를 며칠 간 지키고 있던 경비원 (Joe W. Head)’는 다이아몬드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말하던 다이아몬드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비난이었습니다. ‘쓸데없이 크기만 하잖아?’라고 말하는 부인도 있었고, 자신이 다이아몬드의 흠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부인도 있었습니다. 또 우연히 지나가다 구경하러 온 것처럼 연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로 우스웠던 것은 그들 대부분이 모조 다이아가 달린, 장신구나, 명품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구요? 당연히 알 수 있습니다. 전 지금까지 수십 년간 보석관련 경비 업체에서 일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를 판단하는 사람은 영성이 크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잘못을 찾아냄으로써 자신을 높이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들은 대부분 열등감이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참으로 포도주를 주는 이는 자신을 들어 높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것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무언가를 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전해줌으로써 주님의 필요한 봉사자가 된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봉사자는 타인을 판단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 것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뿐이고 그래서 주님께 칭찬받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주고 있을 때 이웃 주민이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시나요. 당신은 평생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데레사 수녀님은 허리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이 봉사한다고 그와 같지 못한 사람을 나무라는 사람은 아직도 물을 나르는 사람입니다. 포도주를 날라 주는 사람인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나누어주는 그 포도주의 효과를 보며 자신이 더 놀라고 감사하고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가끔 교회를 위한 회의를 하다보면 그 열기가 너무 뜨거울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 되어야만 교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처럼 말하며 논쟁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그 말이 옳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 보면 생각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든 것은 자기가 줄 수 있는 물을 주려고 하는 것이지 주님께서 주시려는 포도주를 주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거기에서 가장 어리석은 의견을 좋아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의 의견이 아니라 주님의 의견을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와 사람을 잡는 베드로와는 천지차이가 나는 것처럼, 물을 나르는 사람과 포도주를 나르는 봉사자 또한 그 존재의 차이는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포도주는 성령이시고, 그 성령은 사랑이며 기쁨이고 평화이며 온유함이고 친절함이며 겸손함이고 오래 참음입니다. 이것은 아는 봉사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내세워 그것이 큰 효과를 보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포도주로 주님과 교회의 혼인잔치가 지속되게 하는 참된 봉사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웃에게 믿음이 아니라 율법을 주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판단이 아니라 자비를 주어야합니다. 그 자비가 참으로 변화시키고 정결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성이 깊어갈수록 사람들의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크게 보이고 급기야는 모든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여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원수까지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눈도 법이 아니라 사랑을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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