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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20 조회수1,248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6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Jesus said to the man with the paralyzed hand,
"Stand here in the center." Then he asked them,
"What does the Law allow us to do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harm? To save life or to kill?"
But they were silent.
Then Jesus looked around at them with anger and deep sadness
because they had closed their minds.
And he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healed.
(Mk.3,3-5)
 
 
제1독서 1사무 17,32-33.37.40-51
복음 마르 3,1-6
 
저는 운전을 2000년부터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차 안에 지도 하나씩은 모두 가지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없었기에, 모르는 길을 찾아갈 때에는 지도를 보면서 가야할 경로를 미리 살펴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을 잃으면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한참 동안 지도를 들여다본 뒤에 다시 찾아가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길을 찾기 위해서 굳이 길가에 차를 세워둘 필요가 없습니다. 목적지만 정확하게 입력만 해 놓으면 교통 상황까지 고려해서 가장 최적화된 길을 찾아주고, 만약에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서면 내비게이션은 스스로 알아서 다시 경로를 찾아주기 때문입니다.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시대에는 어떻게 운전을 했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비게이션은 우리가 편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내비게이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목표를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그리고 틀린 경로로 가면 다시 재설정해서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내비게이션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이라는 내비게이션이 계셔서, 우리의 최종목표를 향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리고 죄로 인해 잘못된 경로로 가면 회개하여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해주십니다.

문제는 그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알리면서 재설정을 해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길이 무조건 맞다며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무시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안내를 무시하면서 자기가 생각한 길로 가는 사람에게 내비게이션의 안내는 하나의 소음으로만 여겨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은 삶을 살아가는데 걸림돌인 것처럼 생각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만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지만 보고 있지요.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 받는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이지만, 그들은 고통 받는 사람의 치유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을 걸림돌이라고 생각해서 제거하려고만 합니다. 주님이라는 내비게이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안내를 절대로 따르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담긴 사랑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별 어려움 없이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여요. 상대의 마음도 보이고요, 이웃의 아픔도 보이고요. 그냥 보아서 보는 것은 아름다운 게 아니에요. 마음으로 보이는 것, 사랑으로 보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랍니다(최복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예수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사람 사이에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고 진정한 관계가 맺어질 때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만남과 진정한 관계가 계속 확장되어 갈 때 공동체의 크기는 점점 더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공동체의 크기를 크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공동체의 크기를 줄이는 역할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너’라고 부를 수 있는 이웃을 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만나는 이웃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품을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르틴 부버는 이런 말을 했지요.

“하느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사람들에게만 하는 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하느님께만 드리는 말씀은 그릇된 것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늘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만을 소중하게 여기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나의 이웃도 또한 그들과 함께 하는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임명장이 우편으로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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