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6-01-23 조회수853 추천수13 반대(0)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조건을 보고 하는 결혼은 실망과 원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가정에는 다툼과 불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성격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 사람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을 채워달라고 한다면 그 결혼은 정말 미친 짓이 될 수 있습니다. ‘젊음, , 명예, 권력이라는 조건만 바라고 결혼을 하는 것은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고 물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하는 것입니다. 바보온달이 배움이 부족하고, 가난했음에도 평강공부는 바보온달과 결혼을 했습니다. 바보온달이 가난함에도, 배움이 부족함에도 그에게서 충실함을,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보온달은 평강공주가 궁궐에서 쫓겨났음에도, 울보였음에도 평강공주와 결혼했습니다. 자신을 믿고, 함께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조건이 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우유부단했었습니다. 모세는 너무 소심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토마사도는 자신의 눈으로 봐야만 믿겠다고 우겼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를 죽이고, 여인을 취했습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도망을 갔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분들을 사랑하셨고, 가능성을 보시고 구원의 역사에 함께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가정은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 만난 것처럼 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갈등이 커지면 다투게 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깊은 상처를 남기고 깨지기도 합니다. 사제들도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부부처럼 한 집안에서 살지는 않지만 더러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제가 신자들과 어울려 식사를 자주하면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고, 늘 성당에 있으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일을 신자들과 상의해서 하면 추진력이 없다고 하고, 혼자서 결정을 하면 독단적이라고 합니다. 강론이 길면 지루하다고 하고, 강론을 짧게 하면 준비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면 정치적이라고 하고, 신앙 이야기를 하면 현실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사제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기껏 준비한 강론을 하는데 주보를 보거나,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피정을 준비했는데 오셔야 될 분들은 오지 않습니다. 성당의 시설물들을 사용하면 제자리에 갖다 놓지 않습니다. 미사 전에 미리 와서 기도를 하면 좋겠는데 미사 시간이 돼서야 성당에 오고, 늦게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당의 재정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사제와 신자들도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해서 오해를 하고,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미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는데 십리를 가주기 때문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 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세와 성공 그리고 부와 명예를 쫓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미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영적인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의 수준에서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나비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여 주셨고,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예수님보다 1000년 먼저 살았고,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성서에서 다윗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가르침을 예수님을 알지 못했으면서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다윗은 신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념이 있었고, 많은 사람을 치유해 주셨고,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역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 신념은 다윗의 삶에서 다가오는 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다윗은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골리앗과의 싸움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우리의 신념은 우리가 꿈꾸는 것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좌절과 근심은 우리에게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병들게 합니다.

 

둘째, 다윗은 용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을 하던 사람들을 용서하였습니다. 배반하여 도망을 하였던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용서를 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용서하였습니다. 나중에 사울이 죽었을 때,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에게 욕을 하는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 다윗은 자비로운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또한 탕자의 비유에서 방황하는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들의 지난 잘못을 묻지 않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주는 아버지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다윗은 반란을 일으키고 아버지에게 칼을 들었던 아들 압살롬을 용서하였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습니다. ‘仁者無敵이라고 합니다.

 

넷째, 다윗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여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기를 바라신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비록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잘못을 하였지만 뉘우쳤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였습니다. 다윗의 통회와 뉘우침이 잘 드러나는 곳은 시편 51장입니다.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시오니 내 죄를 없이 하소서.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저의 허물을 없애 주시고,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소서. 죽음의 형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하느님! 제 구원의 하느님. 제 혀가 당신의 의로움에 환호하리이다.’

 

우리가 다윗처럼, 예수님을 보지 못하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신념을 가지고,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잘못된 길에서 돌아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지상 최대의 힘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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